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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용규 Jun 22. 2020

저의 계절은 봄입니다.

배웠으면 써먹어라-학용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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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식 씨(가명)는 겨우 일어설 수밖에 없는 중증 장애인입니다. 영식 씨의 머리를 몇 차례 이발했지만 그는 늘 말이 없었습니다. ‘헤어스타일을 어떻게 해 드릴까요.’라고 물어보면, 그는 항상 무뚝뚝한 말 한마디뿐입니다. “짧게 깎아 주세요.”  오늘도 역시 베란다 너머 건물에 쓰인 101동 글씨만 쳐다보며 않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그를 101동 아저씨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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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영식이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잘 걸어 다녔던 아들입니다. 어느 날부터 일어나는 것이 불편해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제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든 지경에 왔어요.” 어머니는 아들 영식 씨가 머리를 감고 있는 사이에 아들 얘기를 꺼내 놓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너무 외롭고 힘들다는 말을 계속 입버릇처럼 반복하셨습니다. 저는 한숨으로 가득 찬 어머니를 보며 말했습니다. “영식 씨 보다 지금은 어머니가 더 아프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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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동 아저씨로만 기억했던 영식 씨는 국내 최고의 명문대를 졸업한 수재입니다. 그는 법 고시를 준비했던 법대생이기도 합니다. 고시원에 들어가 몇 해를 공부에만 전념했던 사람입니다. 사법 고시에 합격하면 결혼도 하고 가정도 꾸밀 계획이었습니다. 학창 시절 전교 1등을 도맡아 했던 영식 씨는 부모님의 자랑이었으며, 후배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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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추억을 더듬듯 말을 이어갔습니다. 남편은 젊은 시절 승승장구하던 사업가였습니다. 서울 한복판의 넓은 마당이 딸린 집. 그 마당에서 벗들과 커피를 자주 마셨다고 회상하셨습니다. 부잣집 사모님 · 성공한 남편 · 잘난 아들은 벗들에게 늘 부러움의 상징과도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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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모레면 영식 씨 어머니는 팔순입니다. 남편은 치매로 인해 오래전 요양원에 가셨습니다. 건강했던 아들은 근육병에 걸려 침대에 누워 있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쓰러진 남편과 근육병에 걸린 아들을 간호하느라 재산을 탕진했습니다. 지금은 나라에서 주는 기초 생활비를 받아 풀칠하며 산다고 하십니다. 팔순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꿈은 아들 영식 씨가 죽은 다음 날 죽는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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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마음을 진정시켜 계속 말을 이어가셨습니다. “저는 말년에 겨울이 왔어요.” 어머니의 봄날은 단란했던 젊은 시절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겨울’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계절을 겪게 된다고 일러 주셨습니다. 어머니가 불쑥 제게 물었습니다. “이발사 선생님은 지금 무슨 계절에 살고 있나요?” 어머니의 질문에 잠시 당황했지만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제 인생은 봄인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뭔가 안다는 듯 웃으며 말했습니다.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하셨군요.” 어머니는 젊어서 겨울을 먼저 만났더라면, 지금처럼 살지는 않았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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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헤어지며 한참을 안아드렸습니다. 오랜만에 느끼는 아들 같은 품이 그리우셨나 봅니다. 어머니께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안아 드리는 것이 최고의 인사말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달에도 이발사가 와서 둘째 아들 노릇도 할게요. 어머니’ 이런 저의 마음이 전달되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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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영식 씨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아내가 말했습니다. “근데 왜 101동 아저씨 어머니한테 거짓말을 했어요? 당신은 입버릇처럼 지금이 힘들다고 했잖아요.” 저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할머니의 계절을 보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계절이 봄이었어.”



글쓴이 :  배.주.남 손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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