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고 싶지만 두려운
나보다 스무 해 넘게 나이가 많으신 우리 사장님,
"내가 처음 중국 왔을 때, 하루에 공장을 세네 군데씩 막 돌아다녔어,
그땐 40대 초반이고 젊었거든. 진짜 치열하게 살았지."
지금 내 나이, 40대 초반. 난 하루하루 너무 피곤하고 지치는데.
치열함에 대해 생각해본다.
내 기억 속의 치열함은 10대에 끝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어진대로 공부만 하면 모든 게 정리된 삶으로 인도되는 줄 알았던 10대 후반. 나는 경쟁자가 없었다.
내가 이 길 사람이 없을 정도로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라 정이 뚝뚝 떨어지는 차가운 말투로 할 줄 아는 건 공부밖에 없을 듯하던 우리 학교 문과 1등, "누가 봐도 서울대 " 오 모양도 (실제 서울대 법대를 갔던 오 모양은 이른 사법고시 패스, 판사 , 변호사..... 예상대로 짜인 길을 걸었다 - 대학교 2학년 때 들려온 이른 연애 소식에 다들 놀라기도 했다) 놀 거 다 놀고 책도 많이 읽었지만 여유 있게 상위건을 유지하던 품위 있는 이과 1등, 정 모양도 내 경쟁자가 아니라, 그냥 그 자리에 있는 친구들이었을 뿐 내가 누군가를 이긴다는 기대감으로 성적표를 열어보진 않았다 (물론 내 성적으로는 택도 없는 경쟁상대들이었지만)
부끄러운 말이지만 , 그때는 공부밖에 할 일이 없었고, 친구들과 가끔 노래방에서 한 시간, 버튼을 누르는 시간까지 계산해가며 아쉽게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날리기에 충분했고, 오롯이 나를 위한 공부였기에 "치열하게" 공부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수능이 끝나고 지금 돌아보면 내가 원했는지 어른들이 원했는지 모를 대학교의 입학원서를 받은 날로부터 내 치열함은 소멸했다. 밤을 새워 친구들과 놀던 때도 , IMF, 국가 부도의 위기에 취업준비를 할 때도 대충이었다. 어린 나이에,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으니, 이 정도 적당히 해주면 누군가 알아서 나머지는 준비해 주지 않을까 하는. 하지만 누가, 나 말고 누가 내 인생을 준비해주나. 내가 제일 믿고 의지 했던 우리 엄마도 못 해주는 일을.
이제야 생각한다. 그때 내 치열함이 흔적도 없이 소멸된 건, 그때 목표를 향해 달리는 법을 배우지 못한 때문은 아닌가. 그때 조금 부족하더라도, 내가 왜 이 길을 달려가는지 그 길 끝엔 무엇이 있을 것이고 , 그다음 내가 걸을 길은 어디인지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면 내 시간을 내가 장악할 수 있게 된 지금 진정한 치열함으로 살 수 있었을 텐데.
후회를 할 지금 그 시간에 뭐든 치열하게 하라고 , 스스로에게도 얘기해보지만, 치열하게 살고 싶은 무언가 를 찾은 지금은 어깨의 짐도, 버티고 걸어가야 할 다리도 너무 무겁다. 가고 싶은 길로 방향을 틀었는데 지금 내가 지켜야 할 내 아이들과 재미없지만 평탄했던 내 생활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제일 큰 짐이겠지.
아이러니하다. 이제 겨우 열심히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겼는데 내 맘대로 못하는 40대 어른의 삶이라니... 그래, 뭐, 꼭 삶이 치열해야 하니. 불편한 정도가 아니면 적당히 편하게, 느슨하게 살아도 되지 않나라는 질문도 계속해본다. 벌써 찬바람 불기 전부터 무릎이 시려오고 환절기마다 혀쓴 보약을 먹을까 말까 고민되고 시린 이 전용 치약이 아니면 양치도 두려워지는 내 몸의 작은 신호들을 핑계로 치열한 달리기를 이리저리 피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때가 지나면 더 치열하기는 힘들겠구나. 뒤늦게라도 가고 싶은 길이 생겼으면 지금 무거운 어깨보다 이길 끝에 놓여있을 열매의 달콤함을 상상하며 땀나게 한 번은 "치열하게" 달려봐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살아야 우리 아이들도 치열함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엄마 아빠도 그저, 먹고사는 일에 힘이 부쳐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을 뿐, 왜 그래야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그저 달리기만 하던 치열하셨던 삶이었으니... 목표가 있는 치열한 달리기. 그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다.
"40대 초반이면 제일 치열하게 살 나이지...."
먼 훗날 언젠가, 흘리듯 누군가에게 얘기해도 부끄러운 나이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