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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이지 않는다

다시 볼 수 있기를 , 내가 어떤 사람인지

by 보부장

내게는 나를 보는 능력이 있었다.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거나 미래의 내 모습을 점치는 마술사 같은 능력치는 아니고, 내가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거나 어떤 일을 할 때 당시의 내 모습이 머릿속에 동영상처럼 떠올라, 내가 나를 스스로 관찰할 수 있었다. "능력"이라고 부를 것 까지는 없겠지만, 그 모습을 보며 아 조금 더 웃어야겠구나, 허리를 좀 펴야겠구나 라고 순간순간 스스로를 조정하는 시간도 가졌으니, 적어도 내게는 나를 발전시켜주는 일종의 매니저 같은 큰 역할을 해주었음은 확실하다.


은연중에 바라보는 내가 실제 내 모습과는 조금 달랐던 점을 인정한다. 모르는 척했지만 실은 알고 있었던 것이, 내 기억 속의 나와 어디선가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찍힌 사진 속의 내 모습이 너무 달라 당황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사진을 잘 찍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과 얘기를 하거나 수업 시간에 필기를 하거나, 혹은 못 젖이 다 보이도록 박장대소를 하는 중에도 내가 보는 내 모습은 늘 맑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해 분명하고 무엇보다 자신감 있는 나였다. 현실과 동떨어지게 완벽한 모델 같은 모습은 아니지만 가끔 임산부처럼 배 위에 두 손을 포개어 얹어두고 앉아있을 때에도 뚱뚱하고 나른한 아줌마 같다 라는 생각보다는 "아 , 귀엽네 " 라며 혼자 흐뭇해하곤 했다.


아마도 나는 실제 내 모습보다 내 머릿속의 내 모습으로 살아왔던 것 같다. 마치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라는 영화 속에서 뚱뚱한 여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만 절세 미녀처럼 보이고, 그로 인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처럼 내게만 실제와 다른 내 모습이 보이고, 그래서 내가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가끔 사진 속에 찍힌 나를 보고서도 "사진이 웃기게 나왔네 이것 좀 봐 , 하하하하"라고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들어도 다치지 않을 만큼 나는 자존감이 높았다. 외모만으로 세상을 사는 것은 아니지만, 내 생각과 태도뿐 아니라 내 생김새와 옷차림, 모습에 대해서도 누구와 비교를 할 필요가 없는 소중한 존재로 생각하고 살아왔었다.


내가 나를 보는 이 신비하면서도 말이 안 되는 나만의 능력을 과거의 시제로 이야기하는 것은 최근 들어 더 이상 내가 나를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급하게 여권을 들고 사진을 찍을 일이 생겨 화장이나 머리를 다듬을 새도 없이 흰 벽에 기대선 채로 딸아이에게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아이답게 초점도 구도도 제대로 맞추지 않은 채 손에 쥐어진 핸드폰의 방향대로 클릭 클릭, 버튼을 눌러 찍힌 사진 속 내 모습은 내가 처음 보는, 늙고 지친 중년 여자의 모습이었다. 뭐든 이렇게 건성으로 처리하냐며 괜히 아이에게 벌컥 화를 내고 다시 찍어 달라고 했지만, 아이가 신경을 써서 사진을 찍는다고 내 모습이 달라질 리는 없었다. 조금씩 선명해진 여기저기의 잔주름과 그 주름을 따라 뭉쳐진, 바른 지 10시간이 넘어가는 파운데이션, 아무렇게나 묶여 올라간 머리카락, 조금 부은 듯 퉁퉁한 눈 언저리와 손가락까지. 내가 이런 모습이었나. 객관적으로 지금 내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요즘 들어 내 생활에 나를 볼 수 없었을 알게 되었다. 남달리 튼실한 체격에도 불구하고 소녀처럼 밝고, 맑고, 자신감 있었던 내 모습은 어디 간 거지.



내가 나를 볼 수 없게 된 건, 자존감이 바닥을 치게 된 6개월 전쯤 , 새로운 직장에서 일을 시작하던 때부터였을 게다. 새직장의 동료들보다 미모가 빠지거나 몸매가 좋지 않아서, 옷을 잘 입지 못해서 자존감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부터 시작된 동료와의 마찰과 먼저 자리를 차지한 자의 텃세( 철저히 내 기준으로 고른 단어이긴 하지만)에 마치 하릴없이 나이만 먹은 동네 삼촌처럼 사람들 눈치를 보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니 맘대로 해, 의견은 무시해버려, 일단 밀고 나가 라는 주변의 의견도 많았지만 서로 협력해야 하는 조직 생활만 해오던 나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굴러온 나보다는 기존 직원들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이직 초기의 내 생각은 지금 돌아보니 난 어디서든 누구 와든 잘 지낼 수 있어라는 오만이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전의 직장에서는 분명 옳은 판단이었는데 말이다.


문제는 그냥 힘들고 말면 될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이런 나쁜 상황들의 원인을 내게서 찾게 되었다. 내 생각과 판단을 존중해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향하던 “일을 이렇게 처리하면 안 되지! 저 사람은 왜 저래? ” 라던 질문이 어느 날부터 “나는 왜 이럴까 “라는 질문으로 바뀌게 되었고 누구나 마주치는 작은 실수에도 "나 또 이러네, 왜 이런 것도 못해내지? " 라며 자책을 하기 시작했다. 익숙하게 하던 일도 이제는 이게 맞나라는 의문으로 일의 마무리를 짓지 못할 만큼 내 생각에 대해 점점 자신을 잃었다. 그 시간 동안 내 눈에 씐 나를 보는 마법 콩깍지는 조금씩 사라졌고, 매일 아침 바닥에 떨어진 자신감을 얼굴에라도 붙여보겠다는 듯 안 하던 화장까지 하며 출근을 했지만 이 넓은 사무실에 나는 어디에 있는지, 점점 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많은 부분에서 시간과 일, 생각을 함께 해야 하는 동료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대책이 필요하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다, 전화통화를 하다, 가끔 내 모습을 의식적으로 떠올려 보려 한다. 얼마나 되었다고 그 잠깐이 어색해 일의 흐름을 놓칠 때도 있지만 다시 나를 만나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안타깝게도 아직 내게 보이는 내 모습은 딸아이가 찍어준 사진 그대로 지친 중년 여자가 미간에 주름을 꽉 세운 모습일 뿐이다. 그래도 바라봐야지. 그게 진짜 나라고 해도,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모습일 뿐이라 인정하고 보듬어 줄 수 있도록, 눈 돌리지 말고 바라봐주어야지.


어렸을 때, 인테리어처럼 냉장고 문짝이며 침대맡 벽이며 넓고 빈 공간마다 자신감 넘치는 모델과 연예인 사진들을 오려내어 붙여두던 때가 있었다. 다이어트를 위해 유난히 마르고 가냘픈 사람들만 붙여댔던 것도 같다. 깔깔깔 웃기만 해도 빛이 부서지는 것처럼 예쁠 나이였는데 굳이 왜 그랬을까 생각했던 때도 있었는데...


퇴근길 서점에 들러 십여 년 넘게 구매하지 않던 패션 잡지라도 뒤져봐야겠다. 허름해 보이는(물론 비싸겠지만) 옷을 걸치고도 자신감 있게 포즈를 취한 모델 사진이라도 구할 수 있으려나. 스트레스로 목 언저리에 울긋불긋 돋아난 여드름도 싹 가리고 오래간만에 눈 위아래로 짙게 아이라인도 그어보고. 사진이라면 딸아이보다는 나을 거라 믿는 신랑에게 사진을 좀 찍어달라고 해야지. 얼굴만 살짝 오려내어 자신감 있는 모델 사진에 합성이라도 해서 냉장고에 붙여둬야지. 뇌는 시각적인 자료에 강하다고 하니, 속여라도 보는 수밖에.


이게 나라고.

다시 내가 바라봐야 할, 자신감 있는 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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