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여행들
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에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라떼는 말이지. 대학교 2~3학년 여름 방학에 유럽 배낭여행을 가는 것이 유행이었다. 혼자 가기는 무섭고, 중학교 친구인 윤정이를 꼬셔서 (aka 땐녀) 홍대 앞에 있는 신발끈 여행사에 예약을 했다. 상품명은 호텔팩이었지만, 실상은 호스텔팩.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해서 저렴한 상품이었다. 28일 정도 스케줄에 항공권, 숙소, 유레일 패스 등등해서 220만 원이었나. 200만 원이었나. 항공도 아시아나였다. 낫 배드. 같은 시기에 다른 여행사로 갔던 다른 친구는 21일 코스에 260만 원이었다. 걔는 숙소가 3성급이어도 호텔이었더라고요. 역시, 돈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여행을 떠나기 전에 홍대 여행사 사무실에 모여서 OT를 진행했다. 20명이 같은 날에 떠나는 한 팀이었는데, 단체여행의 경우에 항공권이 무료로 하나가 나온다고 했다. 팀 리더 격인 역할을 맡으면 무료 항공권을 사용하게 해 준다고 했다. 손을 번쩍 든 남학생이 있었으니, 우리는 그 후 그를 마일리지라고 부르게 된다. 여행 리더로 무슨 일을 해결해 준 기억은 없으나, 모두가 눈치를 보는 상황에서 손을 든 용기는 인정한다. 마일리지 오빠는 지금 어디서 뭐 하고 있으려나. 항공사에서 일하고 있으면 재밌겠다.
나도 동창인 윤정이랑 같이 떠났고, 다른 일행들도 대학교 동기들과 둘씩 오는 팀들이 많았다. 직장인 언니들은 일을 그만두고 한 명씩 왔었다. 배낭여행 코스는 보통 런던 in 파리 out이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고, 6월 25일에 인천공항을 출발했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해서 전철을 타고 시내로 들어가는데, 똑같이 생긴 주택들이 끝없이 펼쳐진 풍경에 놀랐었다. 호스텔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건물의 5층까지 40리터짜리 배낭을 메고 올라가는데 힘들어서 휘청하다가 계단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다. 유럽 길은 돌로 된 곳이 많아서 캐리어보다 배낭이 좋다기에, 사촌 언니한테 빌려서 왔는데, 같은 팀 친구들은 거의 캐리어를 가지고 왔었다. 한 달 내내 후회했음.
시차 때문에 잠도 안 오는데 해는 왜 이렇게 늦게 지는지 거의 밤을 새우고 다음 날에 조식을 먹으러 갔다. 블루베리 머핀, 사과 한 알, 요거트 한 팩을 세트로 받고, 시리얼은 개별적으로 그릇에 덜어먹으면 됐다. 다음 날부터는 머핀이랑 사과는 가방에 넣고 나가서 간식으로 먹고, 아침은 식당에 있는 시리얼이랑 토스트로 때웠다. 아껴야 잘 살지.
런던 일정이 다른 도시들에 비해 길어서 (5일 정도?) 대영박물관도 갔다가, 탬즈강 유람선도 탔다가. 버킹엄 궁에도 갔다. 원래도 공원을 좋아하던 나는 하이드파크에서 뒹굴 거리던 시간이 제일 좋았다. 그린파크라는 곳도 가고, 윤정이랑 공원만 보이면 가서 벤치에 앉아서 사과를 베어 물었다. 점심으로는 막스 앤 스펜서에 가서 샌드위치도 사다 먹고, 맥도널드는 단골 메뉴. 여행 삼일 째에 벌써부터 김치찌개에 밥 비벼 먹고 싶었다. 같은 호텔팩에 혼자 온 효신언니랑 친해져서, 이후 일정은 셋이서 같이 다녔다.
저렴한 여행팩이어서 그랬는지, 기차에서 숙박을 해야 되는 날들이 많았다. (유레일패스는 어차피 있으니까 밤기차를 타고 이동하면, 숙박비가 세이브) 거의 삼일에 한 번은 밤기차에서 잤었다. 밤기차는 6인실 컴파트먼트라고 해서 6인 1실인 형태였는데, 도난 방지를 위해서 6인씩 팀을 묶어서 예약을 하게 되었다. 스무 명 중에 이래저래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 각각 팀을 짜게 되었다. 우리 팀 6명은 나, 윤정, 효신언니. 대학 친구들끼리 온 효진, 현진. 그리고 한 살 아래였던 부산사나이 현우. 미식축구선수처럼 덩치가 좋았던 현우 덕분에 우리들은 마음 든든하게 도시 간 이동이 가능했다. 여름방학이라 배낭여행을 온 친구들이 많아서,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고, 스위스에서 케이블카 기다리면서 대학 동기를 만나기도 했다. “어머. 보돌아!”하고 누가 부르기에 돌아보니, “아니 네가 여기 왜 있어.” “뭐야. 나도 여행 왔지!!” 하긴 그건 그렇다. 세상 참 좁다고 느꼈던 순간들.
거의 20년 전 일이라, 이동했던 코스들이 세세하게 생각나지는 않아서 각 나라별 임팩트 있던 에피소드들로 정리해 보겠다.
1. 벨기에 브뤼셀
런던에서 차가운 샌드위치랑 햄버거로 연명하던 우리들. 야간 버스를 타고 도시를 이동했던지라, 호스텔 체크인까지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다들 지쳐서 호스텔 앞 벤치에 늘어져 있었다. 윤정이랑 오늘은 꼭 따뜻한 음식을 먹자고 둘이서 다짐. 감자튀김으로 유명한 나라인 만큼, 감튀를 꼭 먹고, 오늘은 고기 먹자며 스테이크를 먹으러 갔다. 스테이크 먹으면서 감튀를 사이드 메뉴로 먹으면 딱 좋잖아요. 테라스 좌석에 앉아서 맥주도 한 잔 하고, 감튀는 마요네즈에 찍어먹고, 스테이크 쓱쓱 썰어서 먹으니 이곳이 천국. 이 순간을 남기기 위해, 옆자리 노부부에게 부탁해서 스테이크와 함께 둘이서 사진도 찍었다. 지금도 핸드폰에 넣고 다니는, 좋아하는 사진 중 하나이다. 오줌싸개 동상은 시시했고, 근처에서 사 먹은 와플은 맛있었다. 벨기에는 음식들이 참 맛있었던 듯. 특히, 매대에서 팔던 꼬깔콘 모양으로 접어준 종이에 감자튀김을 한가득 담아 마요네즈 찍어먹던 맛이 잊혀지지 않는다. 감자 중의 감자는 프렌치가 아닌 벨지안 프라이라고요.
2. 체코 프라하
내가 여행을 갔던 01년도는 유로화가 공식적으로 유통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지금 찾아보니까 02년 1월부터 사용되었다고 나오네. 그래서, 여행 전에 각 나라별 화폐를 환전해서 가져갔었다. 현지에 가서 달러를 환전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파워 J인 나는 삼성동 외환은행에 가서 바꿔왔었다. 체코는 지금도 유로화가 아닌 코루나라는 화폐를 쓰고 있다고 나오네. 점심을 사 먹고, 단위가 큰 지폐를 내고 잔돈을 거슬러 받았다. 저녁에 슈퍼에 가서 장을 보고, 현금을 냈는데, 캐셔가 “이건 위조지폐야. 사용할 수 없어”라는 것 아닌가. “what!?”이라고 비명을 지르고, 어떻게 해야 되나 머리가 하얗게 되어 서 있는데, 뒤에 서있던 아주머니가 “아가씨. 곤란하면 내가 대신 계산 해 줄까?” 하면서 걱정스럽게 물어보셨다. 누가 봐도 가난해 보이는 여행객이 2~3만 원 때문에 곤란한 모습이 불쌍해 보였나 보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라고 하고는, 지갑에 있던 여윳돈으로 계산을 했다.
여행을 다니면서 위조지폐 사건을 겪은 곳은 프라하가 유일했다. 금액이 매우 큰 것은 아니었지만, 위조지폐라니요. 뒤에서 계산해 주겠다고 하셨던 눈빛에 아직도 감사하다. 여행은 이런 소소한 순간들을 쌓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프라하성에 올라가면서 사 먹은 환타의 탄산이 매우 강했었다. 하필 언덕길 올라가며 마셔서, 탄산이 목젖을 강타. 분수처럼 음료를 뿜어냈던 장면도 기억난다. 휴지라도 건넬 생각은 없이 나를 보며 웃어대던 윤정과 효신언니 얼굴도 생생하다. 슈퍼에서 만난 아주머니보다 못한 친구들 같으니라고!! 카를 교에서 야경도 보고, 블타바 강을 배타고 돌아보기도 했다. 낭만적인 기억은 사라지고, 웃긴 에피소드만 남은 프라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