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시리즈
강릉은 우리 엄마의 고향이다. 사실은 주문진이지만, 엄마가 강릉이라고 하라고 했다. 주문진보다 있어 보여서 그런가 보다. 사실, 강릉에 관한 글을 한번 썼는데, 저장을 잘못했는지 파일이 날라 갔다. 그 뒤로 한 3일 동안 절필 하고 있었다. A4 2장이 날라 갔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나 혼자 취미로 쓰는 글이지만, 저장했다고 생각 한 파일이 감쪽같이 사라진 충격이 컸다. 강릉에 대해 다시 쓰려니 열이 받아서, 방콕이나 둔촌동에 대한 글을 쓰려다가, 다시 강릉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안 물어봤지만, 이런 사연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2015년에 엄마가 강릉과 주문진 사이에 전원주택을 지어서 낙향을 한다는 것 아닌가. 엄마도 아빠도 지병이 있으시니, 고향 가서 자연을 벗 삼아 살 것이라고 하셨다. 전원주택으로 이사 가서 알았는데, 그렇게 말랑한 감성으로 지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집안은 가스를 켜도 춥고, 정원에 잡초는 자라고. 밑 빠진 독에 가스 불 때기. 난방비가 장난 아니었다. 나야 어차피 일본에 있어서, 일 년에 한 번 가나 마나 했었다. 몸이 약한 노인네 두 분이서 주택을 관리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도, 집 앞 의자에서 보던 풍경은 참 예뻤어서 아깝기는 하다. 경치는 가끔 펜션 놀러 가서 감상하는 것으로 하자. ‘나이 들수록 아파트가 최고다.’라는 교훈을 얻고, 3년 만에 강릉 시내의 아파트로 이사를 가셨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의 ‘강릉 일 년 살이’가 시작되었다. 남들은 집 빌려서 한다는데, 공짜로 했네.
강릉에서 일 년이나 지낼 것 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그렇게 되었습니다. 20년에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을 했다. 한 회사에서 10년간 근무했으니, 좀 쉬고 다시 일을 찾아야지라는 계획이었다. 강릉에서 일을 구해야 하나, 서울로 올라가면 자취는 어디서 하나 생각만 하다가, 머리가 아파지면 바다를 보러 갔다. 사주에 물이 없어서 그런지 바다를 좋아한다. 해변에 앉아서 파도치는 것만 3시간 동안 바라볼 수도 있다. 물론 돗자리도 깔고, 간식거리도 있다는 조건하에.
경포 해변에 내가 좋아하는 나무 데크 산책로가 있는데, 벤치들이 바다를 전망할 수 있게 되어있다. 여기 앉아서, 커피도 마시고, 유튜브도 보고. 어느 날은 알밤 막걸리를 한 통 사서, 투명 텀블러에 넣었더니 옥수수 라테 마시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아닌가요? 그냥 대낮부터 막걸리 마시는 사람으로 보였을까요. 새우깡 먹으면서 빨대로 막걸리 마시던 그날이 기억에 남는다. 햇살 좋은 낮 시간에 엉뚱한 짓을 하고 있다는데 해방감을 느꼈다고나 할까. 회사 다닐 때는 생각도 못했지. 암. 내 인생의 여름방학. 방학이 생각보다 길어져서, 강릉에서 겨울 방학, 봄 방학까지 맞았던 것은 문제였지만.
코로나 때문에 실내 활동이 제한되던 시절이라, 시간만 되면 해변이나, 송림으로 산책을 나갔다. 강릉 바닷가는 해변 뒤쪽으로 소나무를 심어놔서, 쭉 따라서 한 없이 걸을 수 있다. 강릉 해변은 경포, 강문, 송정, 안목으로 이어진다. 나는 경포를 제일 좋아했다. 우리 집에서 202번 버스를 타면 20분이면 도착했고, 호수도 있어서 다양한 뷰를 즐길 수 있었다. 경포 호수 뒤쪽으로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이 있는데, 봄에는 벚꽃,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답다. 특히, 봄 벚꽃 시즌이 정말 아름다우니 강력 추천. 근처에, 테라로사가 있어서 커피 마시기도 좋다. 인기가 많아서 자리 잡기 힘든 것이 유일한 단점. 테라로사 드립커피랑 레몬 파운드케이크 먹는 것이 소소한 낙이었다. 생각만 해도 지금 마시고 싶네. 경포 해변은 규모가 커서, 탁 트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곳이 동해안이다!!’ 그래서, 강릉 온다는 사람들에게는 경포부터 추천한다.
강문은 스타벅스에서 보이는 뷰가 좋고, 송정은 군부대가 있어서 편의시설이 많지는 않다. 안목은 유명한 카페거리가 있는 곳. 개인적으로 바다색은 안목이 제일 예쁜 것 같다. 날씨 좋은 날에 보면 에메랄드 빛 그 자체. 인스타 감성으로 오픈 한 카페들도 많지만, 매장은 옛날 스타일이어도 드립 커피가 맛있는 곳이 좋더라. ‘커피커퍼’의 드립 커피 맛있답니다. 맛이 깔끔해서 아 아메로 마셔도 뒷맛이 좋다. ‘보사노바’도 안목에 오픈했기에 가봤는데 괜찮았다. 속초해변 지점은 커피가 진짜 ‘흙 맛’이었는데, 안목은 드립커피가 맛있었다. ‘만석 닭강정’ 분점도 있으니, 포장해서 바다에서 돗자리 피고 먹어도 좋고. 경포에서 안목까지 송림을 따라서 걸으면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참고로, 나는 걸음이 느린 편이다. ‘제주 올레길’처럼, ‘강릉 해송길’ 코스가 있으니, 산책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바다 보면서, 소나무 숲 걸으면 얼마나 좋게요.
주말에는 서울에서 관광객들이 많이 와서 근처도 안 가고, 주중에 주 3회는 바다로 출근했었다. 강릉 살면서 바다 구경 실컷 한 것이 제일 잘한 일 같다. 질리지도 않더라는. 바다 구경 말고 딱히 할 일이 없다는 것이 현실이기도 했지만... 자연을 즐기기는 좋지만, 생활에 불편한 점들도 있었다. JPT 시험을 보려고 했는데, 강원도 내에서 시험을 보려면, 원주나 춘천까지 가야 하는 것이었다. 시험은 오전 9시부터 시작하는데, 원주까지 가려면, 새벽 6시에 시외버스 타고 터미널 내려서, 해당 대학교까지 버스 타고 가고. 아이고야. 시험도 보기 전에 너무 춥고 졸렸다. 한라대학교 강의실 온도가 완전 시베리아 한복판. 와, 그런데 시험 보고 원주 시장에서 먹은 ‘강릉집’ 순댓국 맛이 기가 막혔다. 고깃국 먼저 먹고 있으면, 순대를 찹찹 썰어서 국에 넣어주시는데, 새우젓 얹어서 먹으면 예술. 이것만 먹으러 원주에 가고 싶어 지네. 강릉에서는 도시에 사는 원주사람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모태 서울러가 이렇게 될 줄이야. 강릉을 사랑하지만, 문화생활을 위해 서울에서 5일, 강릉에서 2일 이 패턴으로 살고 싶다. 로또 되면 세컨드 하우스 구입해야지. 설마, 이번 주는 되겠지?
어려서부터 방학에 자주 갔던 강원도지만, 성인이 돼서 일 년이나 지내고 보니 새록새록 강릉에 정이 들었다. 조용하고 깨끗한 도시. 감자전의 고향. 커피 향 솔솔. 마음의 고향 1위는 둔촌동, 2위는 도쿄, 3위는 강릉으로 정했다. 명예 강릉 시민 시켜주시면 잘할 수 있는데, 설악산이 있는 속초도 좋기는 한데, 역시 강릉 바다가 예쁘다. 팔은 안으로 굽어서 그러는가. 아니면, 전생에 신사임당이었던 것?!
강릉에 있는 동안은 허송세월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수다 떨 친구들이 없어서 답답할 때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그래야 하는 시기였던 것 같다. 21년에 서울에 오게 된 것도, 아빠 만나러 왔던 막내 고모가, 월세 주는 집이 비었다고 해서 일주일 만에 후다닥 상경했었다. 인생사 큰일들은 내 의지가 아닌 우연에 의해 일어나는 것 같다. 바다를 배회하던 강릉 백수가 갑자기 서울로 돌아오고, 오랜만에 만난 지인을 통해 면접을 보고, 입사를 하고 21년은 그렇게 흘러갔었네.
역시, 세상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 지금의 내 모습도 3년 뒤에 돌아보면 이해가 가겠지. 지금이 노답이라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니라고요. 흑흑. 지금 발붙이고 사는 곳에서, 아니, 집세내고 있는 곳에서,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이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