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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돌 Jul 18. 2024

제2의 고향 도쿄

고향 시리즈 

 나의 제2의 고향 도쿄. 아무도 안 물어봤지만 대답해 본다. 12년이나 살았으면 고향타령 해도 되는 것 아닙니까. 04년 워킹 홀리데이 때 약 1년, 08년~20년까지 중간에 1년 한국 귀국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내 20대 후반과 30대 전부를 도쿄에서 보냈다. 이렇게까지 오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살다 보니 또 거처를 옮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직장도 걸려있고, 비자도 있고. 그리고, 나는 대도시를 사랑하는 여자. 자연은 가끔, 쇼핑몰은 매일 가고 싶은 사람.      


 서울에서는 강동 쪽에서만 살았는데, 도쿄에서는 반대로 서쪽 지역에서만 살았다. 사이타마현 가와구치에서도 9개월 정도 거주했지만, 그 외는 나카노구, 세타가야구를 중심으로 살았다. 세타가야구는 우리나라로 치면 어디려나.. 송파나 분당정도 느낌?! 세타가야구도 워낙 넓어서 동네마다 분위기가 천차만별이지만. 회사 선배인 케이코와 방 2개짜리 집을 셰어 하면서 이사를 오게 된 곳이 오다큐선 ‘치토세후나바시역’이었다. 우리 집은 지어진 지 40년은 된 3층짜리 오래된 아파트였다. 케이코의 친구네 가족이 소유한 건물이라, 그녀의 친구들이 모여서 사는 작은 공동체였다. 건물이 오래돼서 일반 임대를 주기에는 그렇고, 지인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해서, 결국 12개실 중에, 6개실에 지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게 되었다. 낡은 외관 때문에 주변에 사는 초등학생들이 우리 집을 보고 ‘귀신의 집’이라고 불렀다는 얘기에 다들 한바탕 웃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지금은 1층은 유치원, 그 윗 층으로는 맨션을 지어서 임대를 주고 있다고 한다. 이제 ‘귀신의 집’으로는 불리지 않겠지.      


 비어있는 집중에 하나는 라운지처럼 만들어서 1~2개월에 한 번씩 모여서 식사를 했다. 신혼부부나 돌쟁이 애기가 있는 집들이 대부분이었고, 애들이 조금씩 크면서 다들 단독주택을 지어서 이사 나갔다. 나랑 케이코는 이 건물이 철거되고 새 건물을 짓는다고 할 때까지 눌러살았다. 왜냐면 월세가 매우 저렴했기 때문이다. 이 집에서 토라도 키우면서 재미나게 지냈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웠지만 월세가 싸니까 참아졌다. 집에서 5분 거리에 1층에는 슈퍼, 2층에는 무인양품이 있는 쇼핑몰이 있어서 저녁 먹고 매일 산책을 갔다. 슈퍼 구경은 질리지도 않아 정말. 집이 철거되고는 한 정거장 앞인 ‘교도역’으로 이사를 갔는데, 급행열차가 서는 역인 만큼 규모가 커서 주말에 동네만 돌아도 심심하지 않았다. 골목 곳곳에 귀여운 음식점, 디저트 가게들도 많아서 참 좋아했던 동네이다. 거기서 두 정거장만 더 가면, 한국 관광객들에게도 유명한 미도리 초밥 본점이 있다. 시부야, 긴자에서 먹어도 좋지만, 역시 본점이 제일 맛있다. 우리 집에 머물렀던 한국 친구들은 필수 코스로 미도리 초밥으로 데리고 갔지. 생맥주에 초밥 한 점. 이게 여행의 맛이다. 친구들아.      


 근무했던 회사가 도쿄, 사이타마, 가나가와 근처에 셰어하우스를 운영하고 있어서, 건물 견학차 도쿄 곳곳을 다 돌아다녔다. 동네마다 분위기가 달라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새로운 건물을 오픈하면 가서 사진도 찍고 블로그도 쓰고 했는데, 근처 맛 집과 카페가 어디인지 미리 검색해서 방문했다. 외근 나가서 점심시간에 합법적으로 즐겼던 땡땡이의 맛. 샤이니의 사이타마 슈퍼아레나 콘서트가 있는 날은, 일부러 사이타마의 건물 견학 스케줄을 잡기도 했다. 그러면, 퇴근하고 바로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 신주쿠 건물을 견학하고는, 한창 인기가 높아 웨이팅이 길던 팀호완 딤섬집으로 뛰어가서 웨이팅 시간을 줄이기도 했다. 친하게 지내던 대만 스태프와 이렇게 놀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다 추억이다. 친상. 잘 지내니!? 365일 중 350일은 핑크색 카디건을 입고 있었던 우리 친상. 나도 요즘에 핑크색 옷 많이 입는데, 핑크를 볼 때마다 가끔 네 생각이 난단다.      

 도쿄에서의 일상은 바빴다. 은영이랑은 거의 매주 금요일마다 만나서 삼겹살에 생맥주, 혹은 카라아게에 하이볼을 마시며 신오오쿠보와 시부야를 누볐다. 퇴근하고 시부야 쇼핑몰 한번 싸악 돌고, 하이볼 한 잔 마시면 얼마나 맛있게요. 도쿄에 살고 있는 한국 언니 두 명과는 한 달에 한 번씩 내 사무실이 있는 시부야에서 런치를 했다. 히카리에에서 태국 요리를 먹거나, 새로 생긴 스크램블 스퀘어 딘 앤 델루카에서 브런치를 먹거나 했지. 언니들이 멀리까지 와줘서 고마웠다. 아이들 돌보느라 바빠도 시간을 내주던 착한 언니들. 아는 오빠는 없지만, 언니들은 풍년인 나. 제법 뿌듯해요.     


 하우스 메이트였던 케이코는 하코다테의 고향으로 귀향을 했고, 09년 입사 때 내 사수였던 캇층과는 1~2개월에 한 번씩은 만나서 실없는 농담을 하며, 고기를 먹으러 가고는 했다. 캇츠이 차가 있어서, 드라이브하고 싶거나 짐을 날라야 하는 경우는 항상 부탁을 했다. “아 귀찮게 하네”라고 하면서도 부탁하면 다 들어주던 캇츠 선배. 일본에서 코로나에 걸려서 한국으로 귀국을 한 뒤에도, 남은 짐 정리와 병원 서류 처리도 캇츠이 해 줬다. 나도 평소에 캇츠이 새로운 셰어하우스를 오픈할 때면 가서 김밥과 떡볶이를 해 주며 기념 파티를 도와줬다. 이케아 가구 조립 할 때도 나를 불렀는데, 손재주가 없어서인지 몇 번 시키다가 말더라. 대신에 조립하는 동안에 친구들 먹을 식사 준비를 해 줬다. 잘하는 것을 하기. ‘기브 앤 테이크’라면 정 없고, 서로서로 잘해주면 좋잖아요.      


 6년이나 같이 살았던 케이코는 말해서 뭐 해. 가족처럼 지냈다. 토라를 함께 키울 때는 거의 노부부 모드로. 케이코 어머니가 도쿄에 오시면 모시고 같이 놀러도 가고, 내가 케이코네 하코다테 고향집에 방문하기도 했다. 케이코가 올해는 서울에 온다고 했는데, 오면 카페 100군데 데리고 가야겠다. 맛있는 삼겹살도 사줘야지. 요즘에 서인국과 공유에 빠져서 한국 드라마를 많이 보고 있다고 한다. 타국의 회사에서 만난 인연이 이렇게까지 이어지다니, 감사한 일이다. 결과적으로 전 직장이 나에게 남겨 준 것은 캇츠 선배와 케이코뿐.   

   

 한국어 공부를 하며 알게 된 재일교포 마사에 언니와는 분기에 한 번씩 만나서, 호텔에 에프터눈 티를 먹으러 갔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부자인 언니는 아낌없이 맛있는 것을 사 줬다. 하기사 언니 정도라면, 내가 대학생한테 더치페이하자고 하는 느낌일 듯.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으니 나도 간간이 특산품과 작은 선물로 성의를 표하고는 했다. 호두과자와 한국식 쑥떡을 좋아하던 언니. 멋쟁이라 08년에 만났을 때부터 항상 6-7센티 힐을 신고 다녔는데, 언니도 이제는 운동화만 신고 다닌다. 작년에 만났을 때 이제 무릎이 아파서 못 신겠다고 얘기하는데 “둘이 같이 늙어가는구나” 하면서 웃었다. 언니 덕분에 도쿄의 좋은 곳들도 많이 경험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블로그 이웃인 미탕이 와는 스위츠를 중점으로 탐구하고 다녔다. 딸기시즌에는 딸기 뷔페, 아사쿠사의 팥빙수 가게, 시부야의 에그타르트 가게 등등. 밥과 술을 함께하던 친구들과는 다르게 아기자기한 카페와 디저트를 즐기는 파트너로 찰떡궁합이었다.      


 매주 만나는 친구, 1개월에 한 번 만나는 언니들, 2-3개월에 한 번 만나는 팀들과 번갈아가면서 만나고, 2주에 한 번은 퇴근하고 신주쿠에서 한국어 과외. 봄에는 벚꽃놀이. 여름에는 바다구경. 가을에는 단풍구경. 겨울에는 내 생일맞이 온천여행. 헥헥. 쓰면서도 지친다. 사이사이에 샤이니 콘서트에, 조성진 피아노 리사이틀도 가야 했다. 여름 보너스 받아서는 가을에 해외여행을 가고, 겨울 보너스를 받아서는 연말에 한국에 갔다. 빚도 안 지고, 저금은 적당히 하는(?) 자유로운 생활을 하며 30대를 알차게 보냈다. 모든 것이 한 때라고, 여행을 그렇게 다닌 것도 한 때. 지금은 코로나 이후로 해외여행 경비도 너무 올랐고, 장거리 비행기는 타기도 싫다. 돈이야 언제든지 모으면 되지.라고 정신승리 하면서 타자를 치는데 왜 눈에서 물이 흐르는 것일까. 적금은 조금 더 넣을 것을 그랬다. 반성하자.      


 지인들 소개로 한국 아이돌이나 배우들 방일 시에 한국어 통역이나 잡지사 특파원, 현지 코디네이터 일도 했다. 유명한 그룹들은 없어서 딱히 에피소드가 없고. 어떤 배우의 실시간 통역을 덜컥 맡게 돼서 진땀을 흘린 적이 있었다. 일어를 한국어로 통역하는 것은 수월하지만, 반대 경우는 네이티브가 아니기에 어려운 것. 출연한 한국 드라마 일본 공개를 앞두고 기자들이 모여서 실시간으로 질문을 하는데 배우가 “억새 숲에서 펼쳐진 대결 장면”이라고 대답을 했다. 아 놔. 통역을 해야 되는데 이 단어가 일본어로 생각이 안 나는 것이다. 억새.. 억새.. 때려죽여도 생각이 안 난다. 그냥 “어떤 숲”이라고 대답하고 넘어갔는데 이 대답을 하기 까지도  세 번은 버벅거려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후로도, 은영이한테도 틈만 나면, “야 너는 억새가 일어로 뭔지 아냐?”라고 질문해서, 고만 좀 하라고 핀잔을 들었다. 나의 억새 숲 트라우마 에피소드. 억새는 일본어로 ‘스스키’.     


 한 번은 한국 화장품 회사에서 고객 5명을 뽑아서, 케이블 방송사와 연계해서 도쿄 럭셔리 호텔 및 뷰티 체험을 하는 방송을 찍는다고 했다. 지인 소개로 현지 코디네이터 부업을 했는데, 메이크오버를 할 미용실 섭외, 단체로 식사할 음식점 섭외, 촬영 허가 등등. 일본은 이런 방면에서 한국보다 깐깐해서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60%쯤 일이 진행되던 때, 11년 3.11 동일본 대지진이 터지고야 말았던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이 터지네 마네 하는 와중에 무슨 해외 촬영이겠는가.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수고비는 30%만 받게 된 상황. 이 프로젝트는 일본 모델을 한국으로 초청해서 5성급 호텔에서 고객들과 함께 하는 콘셉트로 변경됐다. 담당자한테 이야기를 듣고, 마침 나도 그때 한국으로 일시귀국을 한다고 했더니, “아니 그럼 보돌씨가 일본 모델 통역 및 가이드해 주세요.”라고. 그래서 결국 일본 모델의 한국 현지 가이드 및 통역으로 포지션이 바뀐 채 일을 100%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때 번 돈으로 2개월 동안 한국에서 용돈으로 쏠쏠하게 썼지.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싶었다.      


 타국 생활이 뭐 맨날 신나고 재밌기만 했겠는가. 다 그만두고 싶다가도, 비자랑 월세 생각하면 참았고, 여기에 다 쓸 수는 없지만 회사에서도 승진 등에 외국인이라 받는 차별도 있었다. 한국에서 회사 다녔어도 느꼈을 감정들이겠지만, 체감상 타국이라 1.5배 정도는 더 힘들었던 것 같다. 울 엄마 말대로 “누가 일본 가라고 했냐!?”이었기에 인내하고 버텨냈던 것. 더는 의미가 없어져서 귀국을 결심했다. 그리고 20년 3월, 회사 동료들과 한 마지막 송별회에서 코로나에 걸리게 된다. 코로나 발생 초기에 일본에서 걸려서 고생했던 스토리는 다른 편에서.      


 다시 생각해도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원 없이 하고 싶은 것, 여행 다니고 살았다. 서울에서 계속 살았었어도 재밌게 지냈겠지만, 지금의 인생과는 달랐겠지. 멀티버스 어딘가 에서는 한국에서 31살에 결혼해서, 초등학생 학부모인 최보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도 행복하겠지? 나는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단다. 도쿄 이야기하다가 왜 멀티버스로 샜는지. 하여간에, 이제 외국에서 살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도쿄는 일 년에 한번은 쇼핑 및 지인 방문차 가고 싶은 도시다. 친구들이 있는, 추억이 방울방울 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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