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시리즈
고향이 어디냐 물으신다면, 그곳은 둔촌동. 10세에 이사 와서, 20세까지는 둔촌아파트, 20세부터 24세까지는 신성아파트. 총 14년을 이곳에서 살았다. 고향으로 느끼게 된 이유는 초중고를 다 여기서 나와서가 아닐까 싶다. 잠실 4단지에서 태어나, 명일동 삼익 그린 아파트를 찍고, 작은 이모네와 가까운 상계동에 2년 동안 이사를 갔다가, 다시 강동구로 컴백. 이사 온 곳이 둔촌동이었다. 잠실 살 때 앞집에 살던 둔촌동 아줌마가, 남자애들 학군은 둔촌동이 좋다면서 추천했다. 보성과 동북이 있으니 맞는 말씀. 그런데, 여자인 나의 학군은!? 일본으로 다시 떠났던 28살까지는 길동에서 살았으니, 28년 인생 전반부의 22년 정도는 강동구에서 살았다. 그래서 그런가, 둔촌동 언저리는 언제나 내 마음의 고향.
사생대회는 올림픽 공원, 소풍은 롯데월드나 아차산 등반. 둔촌 아파트에는 단지 내에 가(종합상가), 나, 다, 라 상가가 있었는데 우리 집은 단지 쪽문에 가까운 동이라, ‘라’ 상가가 가까웠다. 이곳에는 이화분식이라는 오래된 분식집이 있었다. 여기는 다 맛있지만, 특히 김밥이 유명했다. 소풍 때나 학교 갈 때 점심으로 사가면 애들이 맛있다고 빼앗아 먹어서 내가 먹을 것이 없을 정도. 우리 집은 특히 단골이라, 10년 뒤쯤에, 길동 현대 아파트 앞 버스정류장에서 주인아주머니를 만났는데도 알아보실 정도였다. “아니. 넌 402동 딸내미 아니냐.” 여기서 떡볶이 사려고 기다리다가, 김일성 사망 소식 뉴스 속보 봤다는 이야기를 쓰면 또 연식 나오는 것.
중학교 친구들이랑 가끔씩 일요일에 사회체육종합센터의 수영장에 자유 수영을 갔다. 난 물에는 뜨지만, 수영은 잘 못했다. 그래도 애들 간다고 하면 같이 가서 물장구치고 놀다가, 마지막 코스는 길 건너 맥도널드. 나는 맥 치킨 버거 세트를 즐겨 먹었는데 (마요네즈 소스가 기가 막힘) 기억으로는 세트가 2500원이었다. 친구들은 ‘나’ 상가 쪽에 살았고, 나는 ‘라’ 상가 쪽에 살아서. 햄버거 먹고는 혼자 수영가방을 흔들면서 집으로 걸어갔다. 센터에서 운동을 안 배웠던 둔촌 어린이들이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난 처음에는 택견을 배우고, 그다음에는 검도를 배웠다.
택견은 예전에 말했던 영어 과외선생님이었던 지현언니의 남동생이 다녔다. 그 집 아들이 택견을 다니고 10킬로가 빠졌다면서. 엄마가 이야기를 듣고 바로 등록을 시켜서 억지로 갔었다. 어린 마음에 택견은 멋있지 않았다. “이크 에크” 이 구령은 아직도 기억난다. “차라리 태권도를 시켜줘!” 택견만 아니면 다른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을 때, 같은 동 친구인 선희가 검도를 배운대서 따라갔다. 호구 쓰고 있는 언니 오빠들이 멋있어 보였다. “엄마, 나 검도시켜줘.” 무엇이든 간에 나가서 들고뛰라며 검도로 등록을 바꿔줬다. 검도는 4~5개월 정도 했는데, 호구를 사야 다음 단계를 올라가는 시점에서 엄마가 “30만 원 주고 세트 사봤자 몇 달 하다 안 할 테니 사주지 않겠다.”라고 해서 그만뒀다. 엄마 미워. 같이 운동을 했던 선희는 호구를 사서 그다음 단계까지 올라갔었는데 몇 달 뒤에 소리 소문 없이 그만뒀던 것을 보면 엄마 말이 맞았을지도.
집 앞에 놀이터가 있어서, 친구들이랑 만남의 장소는 그곳이었다. 국딩 때는 놀이터에서 뛰어놀았고, 중학생부터는 ‘라’ 상가 슈퍼에서 사 온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벤치에 앉아서 수다를 떨었다. 여름에 그렇게 수다 떨고 오면 다리에 모기 열 방 물려있었다. 우리 집에서 뒤편으로 조금 걸어가면 아파트 사이에 작은 동산이 있었다. 국딩 시절 산수 시험을 망치고 집에 와서는 이곳으로 가출을 하려고 짐을 쌌다. 웃긴 사실은 부모님은 나한테 성적으로 압박을 준 적이 없었다는 것. 혼자서 좌절감을 느끼며, 짐을 싸려는데 마땅한 가방이 없었다. 수영장 가방이 그나마 커서 옷을 넣는데, 반투명 백이라서 가방 내부가 비치는 것이다. 보안을 위해서 가방 안쪽에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 옷과 속옷과 지갑을 챙겨 넣으며 훌쩍거렸다. 우선 뒷동산으로 가출을 한 다음에는 뭐 하고 먹고살아야 하지.
토요일 낮이었는데, 엄마랑 오빠는 어디 갔는지 없고, 아빠가 퇴근해서 집에 오셨다. 엄마도 없으니까 아빠가 짜장면을 시켜줬다. 아빠랑 짜장면도 먹고, 군만두도 먹고, 중식 섭취로 인해 식곤증이 왔는지 졸려서 한숨 잤다. 자고 일어났더니, 방 한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짐 가방 하나. 저 가방이 왜 있나 생각하다가, 다시 짐을 풀었다. 혼날까 봐 채점된 시험지도 찢었었는데, 엄마 아빠 그 누구도 시험에 대해 안 물어봤다. 찢은 종이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놀이터 가서 그네를 타고 와서는 저녁을 먹었다. 누구를 위한 가출 계획이었는가. 역시 애들은 배불리 먹이고, 잠만 잘 재우면 그만이다.
봄이면 벚꽃이 피고, 가을이면 단풍이 들던, 나무가 우거졌던 주공아파트. 일요일이면 엄마랑 천혜상가 목욕탕을 가고, 종합상가 보습학원을 다니고, 사회체육센터에서 자유 수영을 하던 날들. 모교인 위례 국민학교 옆의 ‘나’ 상가. 이화분식과 단골 만화대여점이 있던 ‘라’ 상가. 친구들이 다니던 교회가 있던 ‘다’ 상가. 자전거를 타고 놀러 가던 올림픽 공원. 중심상가 세븐 일레븐에서 사 마시던 ‘빅 걸프 슬러쉬’. 이것 마시면 완전 ‘캘리포니아 걸’ 기분이었지. 미국이라고는 ‘베버리힐즈 아이들’ 드라마로 본 것이 전부였지만.
오빠랑 버스를 타고 돈가스를 사 먹으러 가던 한화 쇼핑센터. 돈가스를 먹고, 쇼핑센터에 가서 엄마가 어린이날 선물 용돈 준 것으로 샀던 핑크색 미니마우스 천 가방이 아직도 기억난다. 남은 돈으로 서점에서 ‘어린 왕자’ 책까지 한 권 사서, 새 가방에 쏙 집어넣고 집에 왔었다. 내가 오빠랑 저렇게 외출을 다녔던 시절이 있었다니... 전생 같다.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알라딘’ 등 디즈니 만화 영화는 매년 잠실 롯데 영화관에 가서 봤었다. 그 시절에는 좌석이 지정제가 아니어서 선착순으로 앉았다는 이야기를 적으면 또 연식이 들통나겠지. ‘포카혼타스’를 봤던 날은 윤정, 윤아랑 롯데월드 놀이동산까지 갔다가 영화를 본 바람에 피곤해서 반은 졸았다.
재개발로 예전의 모습은 없어졌지만, 영원한 내 마음의 고향은 둔촌동 주공아파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