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심재(恪心齋)
시원(始原)을 찾아서
소봉 이숙진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의 뿌리는 무엇인가. 사람마다 한두 번쯤 이런 화두를 가지고 심연에 두레박을 던졌을 거다. 한 번도 뵌 적 없는 까마득한 조상들의 업적을 부모로부터 전해 듣고 자부심을 키우고 실망하게 하지 않으려는 욕구가 솟은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필자의 고향은 아래 윗마을 전체가 전의(全義)·예안(禮安) 이씨(李氏)들이 부락을 이룬 집성촌이다. 동성동본은 결혼할 수 없다는 안전장치(?) 덕분으로 우리에게는 남녀 칠 세 부동석이 적용되지 않았다. 사춘기 무렵부터 두 살 터울로 또래가 정해지며 자동으로 남녀 친구가 같이 놀게 되었다.
방학이면 객지에 나가 있던 학생이 다 모여서 요즘 대학생들 MT 버금가는 놀이를 했다. 외손도 허락이 되어서 외가에 오는 학생이 많기도 했다. 방학이면 타성인 내 친구들도 속속 몰려오니, 어머니께서 막내딸 친구 대접하느라 고생이 많았음에 죄송하기 그지없다. 어떻게 알고 저녁만 되면 남자애들이 불나방처럼 홍일점을 찾아 모여드는지 지금 와서 되돌아보니 참으로 철없이 놀기만 한 시절이었다.
오늘은 재경 전의·예안 이씨 화수회 정기 총회가 있는 날이다. 아득한 역사의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날이다.
학창시절 같이 놀던 친구들이 서울에 와서 다 한자리씩 하고 사니 화수회에 모여서 회포를 푼다. 올해는 더구나 우리 친구 중에서 병원 원장님이 회장을 맡게 되어서 응원 차원에서 우리 또래들이 대거 참석하게 되었다.
늘 정기총회는 각심재(恪心齋)에서 열린다. 각심재는 민속자료 제16호다. 본래 서울시 종로구 경운동에 있었는데 1994년 3월 8일 예안 이씨 이조판서공파종회에서 노원구 월계동에 이건하여 “恪心齋”라 편액한 것이다. 1930년에 지은 개량 한옥으로 설계자는 ‘박길용’으로서 현존하는 몇 안 되는 유작이다. 처마도리, 중도리, 종도리들은 모두 굴도리이고 앞 뒤 모두 부연을 단 겹처마로 팔작지붕이다.
각심재 옆에 자리한 매끈한 피부의 비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정간 공 이명(1496-1569)의 신도비가 있다. (유형 문화재 55호)
조선 명조 때 우·좌의정, 영 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인물로 성품이 단정하여 올바른 주장은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 명종 때 청백리에 녹선 되었고, 죽은 후 ‘정간(貞簡)’이라는 시호가 붙어졌다. 선조 7년에 세운 비로 대제학과 우의정을 지낸 김귀영이 비문을 짓고 병조판서 신충겸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각심재 뒤편으로 올라가면 정간공 묘소가 있다. 우리는 일단 묘소로 올라가서 참배하고 내려와서 숭덕당에 모인다.
숭덕당은 각심재 옆에 지어진 것으로 향사 때나 행사 때 쓰일 커다란 강당 같은 건물이다. 어제부터 임원 부부들이 와서 음식 준비를 하여 뒤뜰이 가득하게 펼쳐놓았다.
특히 우리 안동 풍산 지방은 배추 무가 좋기로 이름나 있었기에 배추 전을 많이 먹고 자랐다. 그래서인지 배추 아홉 통을 사서 전을 얄팍하게 부쳤단다. 세상에나! 이 더운 날 불 앞에서 그 많은 전을 부친 임원 부인들이 안쓰럽다.
“이 좋은 세상에 일백만 원만 주면 출장뷔페를 부를 수 있는데, 왜 이런 고생을 시키느냐?”라고 임원진에 핀잔을 주었다. 어머니가 해 주던 그런 부침개를 지금의 아내가 맞춰 주지 못하니 출가한 딸네들이 그 맛을 보여주리라 생각했단다. 비빔밥도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인데 그릇까지 장만해서 잔치를 차렸으니 더는 할 말이 없다. 나부터 비빔밥보다 배추전만 집으니 웃음이 나온다. 사람의 입맛이란 게 다 어릴 때 어머니가 해 주던 음식이 본인 입맛이다. 안동이 내륙지방이라냉장고도 없고 생선이래야 고등어자반과 말린 상어와 말린 오징어뿐이었다.
일행 한 분이 "조기를 노르스름한 물이 생기게 어떻게 찝니까?" 해서 한바탕 배꼽 간수하느라 들썩였다. 그 어머니가 요리 솜씨가 없어 실수로 밥물이 넘쳐 들어가서 노르스름한 물이 생긴 자반을 먹고 자라서 걸핏하면 그걸 해 달라고 했으리라.
우리의 설명을 들은 그의 지혜로운 아내는 그럼 찜기에 넣어서 찌면 되겠다고 하지만, 무쇠 가마솥 밥 위에 쪄낸 그것과 맛이 같을 수는 없되, 지금은 먹거리가 많아서 옛날 맛이 안 나니 헛수고일 것이다.
서울에서 살면서 그 친구들 모임을 만들어 분기별로 만난다. 한 번은 학모 모임 한 분에게고향 친구 모임에 간다니까, 거기 가면 남자도 있느냐고 물어보며 놀랜다.
"어머, 좋으시겠어요. 저는 남자 친구라고는 초등 육학년 때 경기여중 갈려고 과외 같이 받은 남자애 한 명밖에 없어요." 그 후 여학교만 다녀서 남자 사람 친구는 없다는 거다. 지금은 방구께나 뀌는 집 아들과 결혼해서 엄청 유복하게 살고 있지만, 그때만은 재미없게 산 그녀의 청춘이안 됐다는 생각을 했다.
뒷산에 올라 보리둑 열매도 따 먹고 살구가 노랗게 익었으나 높아서 엄두도 못 내고 침만 흘리다 내려왔다. 이 주위가 전부 산이었는데, 지금은 개발이 되어서 주위가 모두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 옛날 어떤 옹주가 시집오면서 가지고 온 땅이라고 한다. 훌륭한 조상님 덕분에 문중 재산이 많아 후손들이 부담 없이 모일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이 각박한 세상에서도 일가라는 개념 아래 서로의 안부를 물어가며 상부상조하는 모습도 보기 좋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따르르 웃음이 구르다가 기념 타월을 목에 걸고 내년을 기약한다.
각심재를 가 보고 싶은 분은 월계동 청백아파트 1단지 뒤편으로 가면 좁은 도로 왼쪽에 각심재와 이명 신도비가 담장 안에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