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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진 Dec 10. 2021

약속의 하찮음이여!


                    약속의 하찮음이여!

    

  산책길에 마로니에 잎이 툭툭 떨어진다. 알밤과 닮은 마로니에 열매를 욕심내다 헛다리 짚은 다람쥔줄 알고 힐끗 돌아본다.  잎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내리 꽂히는 소리다.


떨어진 마로니에 잎



  코로나 확진자가 칠천 명을 넘어서자 모든 모임이 다시 멈춘다. 매일 만 보를 목표로 하나 오늘은 칠천 보부터 마음이 바빠져 언니에게 그만하자고 한다.





  “안동 건진 국수 해줄께. 우리 집에 가자.”

  “저녁 7시에 줌(Zoom)으로 동인 모임이 있어서 안 돼.”


  내 추억의 음식인 건진 국수를 뿌리치고 돌아서는 발길이 자꾸만 뒷걸음쳐진다. 철없던 시절 방학만 되면 대처에 나가 있던 친구들이 한둘 면 소재지인 우리 집으로 몰려온다.

  담 밖에서부터 “훈아!” 하는 소리가 나면, 댓자나 되는 홍두깨로 국수를 밀던 어머니께서 얼른 한 번 더 민다. 면발이 얇아져서 뚝딱 한 그릇이 더 나온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친구는 그 건진 국수 맛을 잊을 수 없다며 그리워한다.

  입맛을 다시며 집에 들어와 노트북으로 할까 모바일로 할까 고민하다 각도를 조절할 수 있는 모바일로 하기로 결심한다. 이 컬러 시대에 영상으로 만나니 고운 색이 어울린다는 생각에 깊이 넣어두었던 홈웨어를 꺼낸다. 여행길에 바닷가 썬셋 포인트에서 입으려고 사 둔 것이다.


 


  외출이 어려운 시기라 색조 화장을 해 본적이 기억도 안 나는 시점에서 파우더 룸에 앉아 거울을 본다. BB 크림을 콧대 위에 하얗게 바르고 갈색 파우더를 얼굴 가장자리에 신나게 두드린다. 원판 불변의 법칙이 얼마나 변할 수 있을까만, 아는 게 병이라고 원근법의 착시 효과를 노리는 거다. 마스크 시대에 무용지물이던 립스틱도 칠해 보고 머리 손질은 시간 관계로 모자를 쓴다. 20분 전에 하얀 테이블위에 세팅하고 두근두근 심장 부여잡고 휴대전화기를 타악 열었다.

  ‘이게 머선 129?’

  모든 회원이 이러쿵저러쿵해서 불참이라는 대화가 즐비하다. 주선자는 대전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부랴부랴 도서관에 도착했다가 할 수 없으니 다음에 하자는 대화를 남겼다. 한 마디 불평도 없이 다음을 기약하는 그는 참으로 대인배다.

  한껏 부풀었던 설렘이 풍선 바람 꺼지듯 가라앉는다.

사실 나는 지난 생일에 아이들을 이방 저 방 떼어 놓고 줌(Zoom) 연습을 했다. 이 4차 산업 시대에 발맞추려면 배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학교에서 비대면 수업하는 초등 손녀에게 배워 둔 거다.

  고운 드레스를 입었으나 이 거리 두기 시점에 외출도 못하고, 클렌징 폼으로 화장을 쓱쓱 지우는데, 넋두리가 비행하는 마로니에 잎처럼 툭 쏟아진다.  

   

  “오, 약속의 하찮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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