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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진 Feb 13. 2022

바람이 불어도


                           바람이 불어도     

                                                                      이숙진     

   고향 집 뒷산에 수령 칠백 년으로 추정되는 반송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용의 모습으로 휘감은 수형이 경이로워 샤머니즘적 기운마저 감돌았던 나무다. 반송은 줄기가 밑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것이 특징이다. 바깥 모습이 둥그스름하고 부챗살 모양이다. 문중의 정자인 〈침류정〉을 옮긴 터에 심겨줘서, 터를 가득 메울 정도로 넓게 자리 잡았다. 몸통의 넓이가 친구 서넛 걸터앉아 놀기도 좋고 누워서 책 읽기도 마침맞았다. 유년에 걸핏하면 『학클베리 핀의 모험』 『톰 소여의 모험』 등 동화책을 들고 올라가서 해가 기우도록 내려올 줄 몰랐다. 그 반송 나무가 안동시의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나, 여러 해 전 큰바람으로 인해 폐사되었다는 슬픈 소식이 바람을 탔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바람의 힘을 어찌하랴. 유난히 바람이 많았던 해는 대추가 풍년이다. 굳이 벌 나비가 암술과 수술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 않아도, 나무초리를 흔들어서 열매가 열리는 요술을 부린다. 이 모두 느꺼운 바람의 힘이다.

   선바람에 솔숲을 걸어도 바람이 일 때는 설렘으로 솔깃하다. 바람 일어 좋은 날은 정녕 연분홍 꽃잎 사연이 있을 때만의 일이던가. 바람길 따라 걷다 보면, 고샅길을 지나 에움길이 나타난다. 모퉁이에 한 모라기 바람이 불어 부도난 가게의 셔터를 흔든다. 흔들리지 말고 신바람 나게 열리는 날은 언제일까. 봄날 바람결에 내리는 꽃비도 좋지만, 역병의 된바람이 후미진 골목까지 찾아드니 바람이 인다는 것은 정녕 고슴도치 딜레마와 같은 것일까.

   바람의 꼬리가 다 지날 때까지 파도처럼 출렁이는 보리밭 이랑의 춤사위는 또 어떤가. 파도가 거품을 무는 일도 바람이 일어야 가능하다. 바람이 일면, 몽돌 해변의 끝자락에서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대글대글하다. 완도 몽돌 해변에서 몇 음계일지도 모르는 소리를 각자의 곡선대로 젖어 들던 그 아릿한 추억도 바람 일어 좋은 날이어서 가능하다. 그 어떤 바람 이는 소리도 이처럼 저며 들게 아름답지는 않을 것이다.     

   바람이 든다면, 일단 가을무가 생각난다. 바람 든 무는 쓰임을 받지 못하고 버림을 받게 된다. 혹시라도 포장에 틈이 생겨 바람이 발자국을 남기게 되면 골다공증에 걸려 허벅허벅 해진다. 누가 그랬든가. 신문지에 돌돌 싸서 한 번 더 비닐로 바람을 차단하고 박스에 세워서 그늘에 보관하면 결이 쫀쫀하게 살아 있다고…. 그 무는 새봄이 올 때까지 무나물이나 소고기뭇국을 끓일 때 요긴하게 쓴다. 아무리 요요한 사람도 흰소리나 해대며 바람이 든 자는 인정받지 못한다. 진중하지 못하고 경거망동하여 객쩍은 헛바람만 잔뜩 든 사람의 말을 누가 믿어 주겠는가.      

   대선 판에서는 바람 타는 자 수도권 선점한다는 활자가 크다. 누구는 동남풍, 누구는 서남풍이라는 활자는 컬러로 요란하다. 요즘 같은 선거철에 병풍이니 북풍이니 하는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것도 헛바람이다. 가장 세차게 부는 바람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같은 저급한 바람이다. 학력을 부풀렸느니, 공무원을 하인처럼 부렸느니, 를 법인카드로 사다 바쳤느니, 등등 이 모든 게 국민 수준을 낮추는 형이하학적인 바람이다. 이런 나라의 국민이라는 자체로 자존감에 상처를 입는다. 멋진 정책을 발표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존중하는 형이상학적인 바람은 진정 불기 힘든 일일까. 

   미국 뉴욕 시장 선거 바람이 불었을 적에는 ‘피시 게이트(Fish gate)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후보가 나는 *비건(Vegan)이라고 선전했는데, 레스토랑에서 생선 먹다가 들통나서 비건이 아니라 *페스코(Pesco)라고 변명했다. 비건이면 어떻고 페스코면 어떤가. 정확하게 팩트를 말하지 못한 게 패착이다. 과장된 선거 바람이 불면, 손톱 밑에 거스러미조차도 크나큰 혹으로 부풀려진다. 과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달을 따라 바닷물이 움직이고 해를 따라 꽃이 움직이는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   


   얼굴이나 몸에 바람이나 연기, 햇빛 따위를 직접 받는다는 현상을 바람을 쐰다고 한다. 바람을 쐬는 일은 사물이나 사람에게 모두 유익한 일이다. 볕 좋은 날 된장 고추장 항아리 뚜껑을 열어서 바람을 쐬게 해 준다. 바람과 햇볕이 함께 지나가며 모의해야 숙성이 깊어 들큼해진다. 겨우내 옷장에 빼곡히 걸려 있는 옷들을 내다 바람을 쐬는 일도 중요하다. 자칫 큼큼하고 습한 기운도 바람 길이 있어야 보송해진다.     

   뭇 사내들이 만약 바람이라면, 메릴린 먼로의 치마 밑에서 불고 싶겠지. 지구의 반을 차지하는 그들은 그리스나 로마 유적지보다 먼로의 치마 속 유적지가 더 궁금할 터. 어쩌나, 섹슈얼한 먼로 이야기가 나오니 또 남녀상열지사가 생각나네. 하룻밤 자고 만리장성 쌓으러 가지 말고 자중할 일이다. 사람의 관계가 어찌 에롬시롬이 없으랴. 꽃을 피운다는 것은 아름답고 성스러운 일인데, 바람을 피운다는 것은 가장 비겁하고 무책임한 일이다. 인간관계에서 신뢰가 깨지는 원인이다. 어리석은 우리네 삶의 남루다. 느닷없는 회오리바람이 불어도 다시 태양은 떠오르니, 역시 바람은 지나가는 것이리라.


   폐사된 반송 나무를 다시 만날 수는 없지만, 다시는 싹쓸바람이 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다만, 그저 해 뜰 참에 살그미 부는 명지바람만 오기를…. (끝) 


         

* 비건(Vegan) : 모든 육식을 거부하고 식물성 식품만 먹는 완전 채식주의자

* 페스코(Pesco) : 생선까지는 먹는 채식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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