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극 '이불'에 대한 견해
무언극 ‘이불’에 대한 견해
따스하고 포근하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듯하다. ‘이불’이란 말만 들어도 빨강 깃이 실루엣으로 어른거리는 건 아마 어린 시절에 있었던 데자뷔(deja vu)일 거다. 한국 전쟁이 터지자 우리 가족은 고향으로 내려가서 살 때, 검은색에 빨강 깃을 댄 무명 이불을 덮고 잤으니까. 지금은 풍기 인견이나 양털 이불 같은 시원하고 따뜻한 이불이 있지만, 그때처럼 아늑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세간에 대통령 축하 무대에서 기습뽀뽀를 한 분이 이튿날 아침에 SNS에 ‘이불 킥’을 날렸다고 고백해 웃음 짓게 한 적이 있다. 이불 킥은 직역하자면 이불을 찬다는 뜻이겠지만, 신조어로서 사전적 의미는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가 생각나 창피할 때 쓰는 말’이다.
이런저런 추억거리를 내재한 ‘이불’을 소재로 무언극을 한다고 하니 새로운 접근이어서 호기심이 신장개업 풍선처럼 부푼다. 대사가 없는 작품을 시각적인 효과로 어떻게 풀어낼까 하는 기대가 만만치 않다. 친구와 나름대로 상상을 늘어놓다가 공연 시간 임박해서 들어가니 만석이다. 진행요원이 안내하는 맨 앞 방석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다리를 뻗어 봐도 포개 봐도 불편한 건 마찬가지다. 무릎을 한쪽만 세워도 양쪽 다 세워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혼불을 쓴 최명희는 ‘동정 귀 어긋난 년, 버선 수눅 뒤바뀌게 신은 년, 가리마 비뚤어진 년, 낭자머리 뒤 꼭지에 머리카락 삐친 년’은 사람으로 치지 않는다고 했는데, 앉은 자세가 단정치 못하여 그녀에게 지적받기에 십상이다. 하지만 차츰 배우들의 열연에 빠져들면서 불편하거나 흐트러진 모습 걱정은 뒷전이 되고 말았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집에 물이 차오르는 모습, 비가 오며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는 모습, 추워하는 아내를 보면서 이불을 꺼내는 모습에서 ‘집’이란 공간을 떠올린다. 모두에게 이불은 가족과 함께 덮는 것, 집 냄새가 나는 것일 거다. 팸플릿에서 지적했듯이, 관객들은 오로지 배우들의 몸짓에 따라 그들의 여정을 함께한다. 허공을 집는 배우의 손짓에 따라 무엇을 창조해 내는지 함께 그리기도 하고 함께 허문다. 없지만 있고, 있지만 없다.
바로 옆에서 실시간으로 음향효과를 만들어내는 것도 볼거리다. 물방울 소리, 폭풍우 부는 바닷가 소리, 뱃고동 소리 등 여러 가지 소품을 이용해서 관객의 청각을 즐겁게 해 준다. 은은한 향기도 나는 듯 착각에 빠진다.
홍수가 나자 이불로 배를 만들어 스름스름 노 저어 나가는 모습을 연기한다. 여태 아이들을 키우면서 이불로 그네는 태워줬어도, 배를 만들어 항해한 적은 없었는데 무릎 치게 한다. 이불 속에서는 싸우기도 했지만, 이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마음 하나 되어 ‘함께’라는 단어를 읊조린다. 말에는 마음 온도가 스며드는 법인데, 마임은 동작 하나하나에 온도를 불어넣어야 하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2m 거리에서 지켜보니 배우들은 온통 땀범벅이다.
어떨 때는 내 앞으로 마구 내 달려 1m 앞에서 새물새물 미소 지으니, 만약 눈이라도 마주치면 반응(Reaction)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아노미 상태에 빠진다. 같이 웃어줄까 아니면 엄지 척을 해 줄까 갈등하는 순간 다른 곳으로 방향을 튼다. 중앙으로 가서 이불로 몸을 가리고 얼굴만 내밀고 남상남상 관객들을 엿보기도 하며 따사로운 온기를 전해준다.
어설픈 가납사니 수다보다 이들의 마임이 전해오는 속도가 빠르다. 극장가에서 디스토피아 영화가 판을 치는 세태에 묵묵히 이런 무게 있는 무언극의 발전을 위해 애쓰는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들이 흘리는 비지땀이 내 등을 토닥토닥해주는 기분으로 온화하다. 코끝 시린 계절에 참 잘 어울리는 극이다.
밖으로 나오니 청계천변에 밤도깨비 시장이 열리고 있다. 여기저기 밤도깨비 점포들을 기웃거리다 청계천으로 내려가 바람에 뺨을 내주고 걷다가, 꽃으로 벽장식을 한 풍경이 예뻐서 앵글을 맞춘다. 모두 재활용품으로 만든거라 더 멋이 있고 가치가 있어 보인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서 콧노래를 흥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