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녕 말문 트기 어려운 사람인가

by 소봉 이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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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산책도 나름의 운치가 있다. 적당히 뺨을 간질이는 삽상한 바람의 맛이 쏠쏠하다. 멋진 노을은 언제나 솔깃하다. 동네 둘레 길을 여섯 바퀴 돌면 만 보가 된다. 시부저기 시작한 일이지만, 빼놓을 수 없는 일과가 되었다.

온기가 가득한 집안으로 들어서자 몸은 노곤하지만, 만 보를 걸었다는 뿌듯함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는데 전화벨이 요란하다.

“시골에서 늙은 호박을 가져와서 떡을 쪘는데 맛이 괜찮아서 좀 드릴까 해서요. 우리는 나중에 만나더라도 떡을 현관 문고리에 걸어 놓겠습니다.”

이웃에서 가끔 오가며 커피 마시던 사이다. 코로나 때문에 두어 달이나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사는 처지다.

그녀는 늘 나를 보는 눈빛과 행동에 호기심이 묻어있다. 사람을 잘 못 사귀는 나로서는 그런 친절한 이웃을 만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산책 중 땀을 많이 흘린 터라 샤워하느라 시간이 좀 지났다. 아차! 해서 현관문을 빠끔 열고 보니 아무것도 없어서 얼쯤 하다. 아마 내일 내려오는 길에 걸어놓겠다는 말을 잘못 들었거니 하며, 모래시계를 뒤집듯 생각을 뒤집었다.

다음 날 산책길에서 만나 호박떡은 어떻게 되었냐니까, 그 대답이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친다.

강아지 산책시키러 내려오는 길에 현관에 걸어 놓고 나갔다가, 들어오는 길에 보니 그대로 매달려 있어서 자기가 실수한 줄 알고 얼른 갖고 갔단다. 이 사회적 거리 두기 시점에 음식 나누는 게 결례구나 생각했단다. “착각은 자유, 결론은 버킹엄”이란 농담이 유행하던 옛날이 아른거린다.

평소에 내가 상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사람이면, 벨도 못 누르고 다시 전화도 못 하고 도로 갖고 갔을까. 민망하기 짝이 없다. 그 다정한 사람에게 오사바사하지 못한 나는 정녕 말문 트기가 어려운 사람인가. 익히 내가 좀 어려운 사람임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남을 불편하게 한 줄은 몰랐다.

언젠가 김광한 평론가께서 필자의 실명 시를 써 주신 게 생각나서 옮겨 본다.



실명 시(實名詩)/소봉 이숙진


조선조 태종 때 공신(功臣) 이숙번(叔蕃)은

품성이 오만방자해서

백성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으나

훗날 비슷한 이름의 소봉 이숙진은

여성으로는 만인의 귀감이 되는 인격과

시문으로 일가를 이루었으니

연관 지어 생각하는 사람, 혹 있을까

염려되네.

남자가 말이 많으면 좀스럽고

웃음이 헤픈 여자는 지조가 의문인데

소봉 이숙진 시인은

어쩐지 말문 트기가 힘든 몇 안 되는 사람 같아

실수할까 조심 가는 사람이네

지조가 뿌리내린 경상도 양반 가문의

오랜 내력이 바탕이 되어

늦게 터진 글줄이 태산(泰山)을 휘감네

정중동(靜中動)의 은은한 문장들은

시가 되고 수필이 되어

누가 뭐래도 시인 겸 수필가의 칭호를

넘보지 못하게 하는 사람,

어휘를 선택할 때마다

문장을 다칠까 염려하는 조바심,

조선조 두 여인의 애달픈 고사,

유 씨 부인의 조침문(弔針文),

혜경궁 홍 씨의 한중록(恨中錄)이

그렇듯이

소봉 이숙진의 글에는

세상 살면서 넘어져 발목 다친 이야기가

그저 농담으로 적혀 있는

슬픈 자화상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시인의 곁으로 모여든다.

이름을 남기기보다

삶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발걸음이

뭔가 쓰면서 가자 재촉하는데

시인은 자꾸만 주저가 된다.

뒤돌아보는 마음이 된다.

삶의 품위와 글의 품위가 비례가 된다면

그까짓 거 하고 넘겨버리지만

이제 글은 시인의 곁에서

자꾸만 숙제를 내민다.

어려운 인생의 후반기 숙제를...

그것들은 혼자서 풀어야만 한다.

숙명처럼...

시가 되고 수필이 되고

때로는 더 긴 글로서

해답을 줘야만 한다.


내가 얼마나 어려운 사람인지 입증하는 시다.

이웃집에서 커피 마시러 오라면 그냥 뛰어가도 되련만, 어쩐지 습관이 되어 양말 찾아 신고 옷 갈아입고 격식을 차리다 보니 상대방이 어려워하게 된다. 늘 반성하지만, 바뀌지 않는 태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연구 대상이다.

모든 해프닝은 본인이 자초한 것!

글을 잘 쓸려고 아등바등할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편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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