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존심이던 어머니

(사친문학 가을호 게재)

by 소봉 이숙진

나의 자존심이던 어머니


유년에 내 어머니는 나의 자존심이었다. 새까만 비로드 치마에 황금색 모본단 저고리를 입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외출을 할 때면 기분이 둥둥 떠올랐다. 동백기름을 발라서 반듯하게 빗어 넘긴 쪽 찐 머리는 단아하고 기품이 있었다. 누구든지 어머니를 보면 “어머니가 참 미인이시구나.” 해서 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만 해도 내 고향 안동 지방에는 전쟁 통에 남편을 잃은 여인들이 어머니를 비롯하여 여럿 있었다. 혼자 된 이웃들이 저녁마다 우리 집에 모이면 어머니는 이야기책을 들고 그들에게 읽어주었다. 그 중엔 ‘두껍전’이 가장 또렷이 기억이 난다. 몇 번씩이나 들은 내용인데도 권선징악의 결말에 가선 늘 감동을 하고 눈물을 흘리던 순박한 분들이다. 나는 그때만 해도 어머니가 굉장히 유식해 보였고 자랑스러웠다.

동무네 집에 가서 삐딱 숟가락으로 감자를 긁어주고 와서 꾸지람을 들었다. 집에서 손 다친다고 못 긁게 하니 그게 그렇게 해 보고 싶었다. 안 긁었다고 거짓말을 해보았지만 앉아서 삼천리 서서 구만리라고 하니, 혹시 엄마는 신이 아니냐는 생각에 두렵기까지 했다. 성인이 되어서야 감자녹말 즙이 얼굴에 하얗게 튀어서 들켰음을 알았다.

머리를 귀밑 3cm까지만 잘라 달라고 했는데 너무 짧게 잘랐다고 온종일 따라다니며 원상 복구하라고 심술부렸고, 교복 흰 깃에 풀을 먹이다가 조금이라도 검은 딱지가 앉았으면 당장 새로 해 달라고 강짜를 놓았다. 그것뿐만 아니라 다리 다칠까 봐 자전거를 못 타게 한 엄마를 한없이 원망했고, 헤엄치러 강가에 못 가게 한다고도 늘 툴툴거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추운 겨울 학교에 가려고 문을 열고 나가보면 어느새 부뚜막에서 따뜻하게 데운 신발을 내주셨다. 땔감이라고는 아카시아 아니면 쌀겨를 풍구 돌려가며 불을 지펴야 했지만, 늘 따뜻한 물로 세수하게 하던 어머니다. 방학만 되면 철없는 악동의 친구들이 몰려오니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뒷산을 개간하여 감자, 옥수수, 고구마 등을 잔뜩 심어서 간식을 내주던 어머니다.

그렇던 어머니에게 반항하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였다. “가정 경제는 자녀들이 어릴 때 저축을 해야 학령기에 학비 조달을 할 수 있다.” 라는 가사 선생님의 수업을 듣고 와서 그동안 이상히 여겼던 우리 집 내력을 꼬치꼬치 물으며 어머니의 아픈 가슴을 마구 헤집었다. 진작 분가를 하지 않고 왜 우리 학령기에 와서야 합리적이지도 공평하지도 않게 입에 풀칠만 할 정도의 전답만 가지고 나왔느냐고 따졌다. 그리고 큰집은 전국구로 산지기가 있고, 온 동네 텃세를 받고 텃밭도 수두룩한데, 왜 우리는 상추 한 포기 꽂을 밭뙈기도 하나 없느냐고 앙앙거렸다. 경제에 대해서 생각이나 해 봤느냐고 따지면서 감나무가 열 그루면 한 그루라도 나눠 가져야 될 것 아니냐고 분노를 터트렸다.

부잣집에서 자란 어머니가 경제관념이 희박한 탓도 있고, 우리 삼 남매는 아기 때라 아무것도 몰랐으니 어쩌겠는가. 내가 분노를 터트릴 때마다, 너희는 그런 이야기는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단속시키니 억지 춘향으로 입 다물고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칠순 즈음 아버지께 써둔 편지를 보고서야 어머니의 그 쓰린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원수로다, 유교가 원수로다…….’

첫머리만 읽어도 그놈의 유교 사상이 머릿속에 박혀서 가문의 명예와 동기간의 우애를 더 중요시하여 얼굴 붉히지 못하고 가난의 굴레를 뒤집어쓰고 살았던 의문이 풀렸다. 옛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억울한 심사가 뒤틀린다. 하지만, 어릴 적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던가. 가난이 준 '역경의 생산성'이 내 인생에 많은 플러스 요인이 되기도 했으니, 어머니 말씀 들어서 손해 보지는 않은 것 같다.

외동아들인 오빠와의 차별대우를 절대로 용납 못 하던 악동에게 “저 못된 것!” 하면서도 너그러이 용서하시던 어머니다.

초등학교 시절 지각한 짝꿍에게 선생님께서 왜 지각했느냐니까, 닭이 알을 늦게 낳아서 그렇다고 해서 온 교실 안이 따르르 웃은 적이 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우리 집은 암탉 세 마리가 낳은 달걀은 당연히 오빠만 아침 점심 저녁 세 개를 먹었으니….

지금도 가족 모임이 있을 때마다 그 달걀 이야기로 해서 한바탕 웃음바다에 파도가 넘실댄다. 남아 선호 사상에 지극히 젖어있던 어머니를 이해는 하면서도 괜스레 투정을 부렸던 거다. 오래전에 ‘아들과 딸’이라는 연속극이 인기리에 방영되었을 때, 꼭 우리 집 이야기라고 해서 듣는 이 모두 고개를 끄덕인 적도 있다.

그렇던 어머니가 내가 결혼하고부터는 이 막내딸이 어머니의 자존심이 되었다. 친정 쪽에 애경사가 있으면 벌써 “입성을 바르게 하고 오너라.”라고 전화를 하신다. 늘 갈색 톤을 즐겨 입는 내 취향이 못마땅하신 거다. "고운 옷을 좀 입어라." 하며 은근히 압력을 넣으셨다.

고향을 떠나온 지 스무 해쯤 된 어느 해, 고향 집 ‘일성당’이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복원식을 할 때였다. 서울에 사는 친척들이 모두 귀향하게 되었다. 한 달 전부터 어머니는 내가 입고 갈 옷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셨다. 할 수 없이 혼수로 받은 빨간색 비로드로 투피스를 맞춰 입었더니, 귀향 열차 안에서 “엄마를 위한 빨강 투피스”란 화두가 가장 볼륨이 높았다.

노인정에서는 막내딸이 쓴 책을 들고 나가 자랑하느라 목이 마르셨다. 용돈을 많이 드리는 것보다 노인정에 수박 몇 덩이 사 가는 것을 더 좋아하시던 어머니. 노인정에 찾아가면 반기는 모습이 초등학교 교실에 어머니가 오셨을 때 좋아하던 나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도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했던 무심하고 덜된 딸이다. 이젠 노인정에 갈 일도 없고 수박덩이를 김치냉장고에 넣어 식힐 일도 없다. 해마다 오월이 오면 어머니를 찾아가던 내가, 지금은 내 아이들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어머니의 그 깊은 뜻을 헤아리고도 남는다. 역시 어머니는 나의 자존심이고, 내가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이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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