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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드 Nov 03. 2019

마라톤 10km를 처음으로 완주했다.

기록 달성 기념, 넘치는 자기애로 완주썰을 풀어봅니다.

처음으로 2km를 뛰고 환희에 차 글을 적었던 게 9월 3일. 그로부터 딱 3개월이 흐른 11월 3일 오늘, 10km 마라톤을 완주했다. 기록은 65분, 목표보다 15분이나 빨리 결승선을 통과했는데 메달을 받아 쫄래쫄래 집에 오니 이보다 더 뿌듯할 수는 없는 거다. 내년에도 혹시 대회를 나갈 지 모르니, 1년 전의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기억할 수 있도록 간단하게 소감을 적어보기로 한다.


이전글: [첫 러닝을 시작했다]




1. “함께”에는 힘이 있다.


러닝 크루가 유행이라는 말을 아주 여러 번 들었다. 그래도 그런 모임에 선뜻 도전하기는 어려웠다. 위아래 복장을 나이키나 뉴발란스 정도는 가서 맞춰 입어줘야 할 것 같았고 1키로에 7-8분이 걸리는 러닝 실력도 부끄러웠다. 무엇보다 제일 부끄러웠던 건 내 빨간 얼굴인데, 안면홍조가 있어 덥거나 쪽팔리거나 힘들면 바로 알레르기처럼 군데군데 빨개지는 얼굴을 남이 보는 게 싫었다. 그래서 마라톤 대회까지 연습은 쭉 혼자 했다.


하지만 대회에서 제일 힘이 된 건 같이 뛰는 사람들이었다. 나를 말도 안되는 속도로 뛰게 했다. 심지어 첫 2-3키로까지는 4, 5분대로 뛰었는데, 오르막길을 그 정도 속도로 쉬지 않고 뛰어본 건 지난 3개월 훈련에서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같은 방향으로 달려가는데, 그 템포가 나를 자극했는지 나는 좀 더 높이, 좀 더 큰 보폭으로 뛰고 있었다. 물론 다들 나를 휙휙 지나 가시기는 했지만.

결승선을 통과하고 게토레이와 메달, 간식을 기다리는 사람(떼)


러닝 크루들이 가장 힘이 됐던 순간은 그만 두고 집에 얼른 가고 싶어졌던 7-8키로 즈음이었다. 밥을 든든히 먹으면 못 뛸 거 같아서 고구마 하나 주워먹고 나왔는데 탄수화물의 기운이 바닥난 거 같았다. 5키로 지점에서 파워에이드를 '두 잔' 마시고 다시 액상과당빨로 발걸음을 재촉했는데, 7, 8키로 구간에서는 “힘들다”가 아니라 “힘이 없다”고 느꼈다. 뭐랄까, 글리코겐이 소진된 느낌. 뭔가를 빨아먹거나 하는 분들이 보였던 걸 보면 그 지점이 모두의 글리코겐 소진 시점이 아닐까.


그런데 앞서가는 러닝크루가 소리를 질렀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던 중이었어서 뭐라고 하신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화이팅~!!” 같은 소리였을 거다. 선창에 이어 여러 명의 사람들도 “화이티이이이~~~~~잉” 하고 응원을 이었다. 나한테 응원한 건 아니었을 것 같은데 나도 대답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되면서 나지막하게 화이팅을 읖조렸다. 옆에 뛰던 외국인 참가자는 그 소리에 박수로 답했다.


출발 전부터 디스카 디스카를 외치던 DJ버스도 한목했습니다


이렇게 두 번, 세 번 화이팅을 외쳐주었던 러닝 크루들 덕에 마지막 2.5키로를 뛸 수 있었다. 앞선 구간에서 생각보다 속도가 빨랐어서, 배고파 배고파 읊조리던 마지막 2키로는 그냥 걸어서 들어가고 싶었는데 크루분들 덕분에 한 걸음이라도 더 내딛었다. 자기가 속한 러닝 동호회의 티셔츠를 입고, 혹은 깃발을 들고 뛰시던 분들 다들 정말 대단하시고, 덕분에 저도 응원을 주워먹으며 평소보다 월등히 좋은 속도로 완주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덧

신청순번으로 그룹이 배정되는데 나는 B그룹이었다. 출발할 때 나는 B그룹의 선두에 서있었다. 끄트머리에 서있다가 C그룹한테 출발하자마자 추격당하는 게 싫었고 A그룹에 선배가 있었기 때문에 내심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결과적으로는 선두에서 출발한 건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 페이스 메이커를 포함해 실력이 월등하신 분들이 그룹 앞단에 계시는데 그 분들의 출발 속도가 내 출발 속도가 됐고 기준점이 되었다. 처음을 화이팅 넘치게 시작한 게 10키로 내내 빠른 속도를 유지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됐다.



2. 러너들의 넘치는 자기애


마지막 코너를 딱 돌고 나니 결승선이 보였다. 나는 질주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전속력으로 뛰기. 이미 당 딸리는 느낌이 내 뇌에 “배고프다”로 전달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여기만 넘으면 간식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반복하며 ㅋㅋ 미친듯이 달렸다. (단순)


나이키러닝앱 기록으로 64분, JTBC 기록으로 65분으로 골인했다. 파워에이드와 메달, 간식을 배부받았고 폭발하는 뿌듯함과 자부심에 여기저기에 카톡을 보내고 인스타 업로드를 했다. 다시 여의도 공원으로 진입해 맡겼던 짐을 찾고, 선배를 만나 기념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공원 뒤쪽으로 이동해 철푸덕 주저앉아 간식을 먹기 시작했다. 초코파이와 그래놀라 바, 바나나, 소보로빵. 급하게 몸에 당분을 공급하며 우리가 평소보다 얼마나 잘뛰었는지, 다음에 더 잘 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살을 빼야한다가 결론) 선배랑 수다를 한참 떨었다.


얼마나 간식이 좋았으면 메달을 간식이랑 같이 찍었다


그런데 오마이걸의 노래, “다섯 번째 계절”이 들리는 것이었다. 퀸덤 때문에 요즘 오마이걸 정말 좋아한다.  그런데 ‘어! 나 오마이걸 짱 좋아하는데!’ 하고도 무대로 나가보지 않았다. 그냥 뒤쪽 구석에 계속 앉아서 수다와 식사를 이어나갔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나와보니, 무대에는 다른 가수의 공연이 한창이었는데 무대 앞이 참 한산했다. 대신 북적거리는 곳은 포토존이었다. JTBC에서 몇 군데의 ‘인스타그래머블’한 장소를 마련해 두었는데 스팟마다 줄이 백미터. 사람들은 무대의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줄 서있는 채로 흥얼거릴 뿐, 완주 인증샷을 찍는 데에 몰두해 있었다. 나와 선배 역시, 사진 줄을 서고 있진 않았지만 주체할 수 없는 자기애로 스스로를 쓰담쓰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심지어 건강하고 예뻐보이기까지 했다. 좋아하는 연예인보다 자기 자신이 목표를(그것도 건강한 목표를) 달성했다는 데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그래도 신기한 연예인. 장성규 아나운서 얼굴이 너무 작고 정말 잘생겨서 놀람



3. 마라톤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


마라톤 출전에 부담을 오지게 느끼고 있었던 내게 선배는 어차피 마라톤은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했다. 하지만 자기와의 싸움이 나는 늘, 훨씬 무섭다. 나의 ‘자기’는 내가 뭘 하면 잘해야 하고, 완주도 못하면 안되는 거고, 그러니까 대회 규정상 80분 안에는 뛰어야 하고, 중간에 돌아오는 건 너무 쪽팔리다고 나에게 말하는걸.


고백하자면 그 완벽주의(?)와 부담 때문에 2km 뛰고 성취감에 날뛰었던 9월 3일 이후로는 단 한번도 달리기가 그처럼 즐겁지 않았다. 11월 3일까지만 하고 땡, 절대 다시는 하지 않을 참이었다. 그래서 출전 당일까지 ‘러너스 하이’ 같은 건 느껴본 적 없고, 아침 일찍 못 일어나면 그 핑계로 대회를 안 가버려야지… 하는 회피 가득한 마음으로 대회 전날 새벽 늦게까지 신서유기를 보다가 자기도 했다.



메달은 자취방 지킴이 버즈에게 선물했다


오늘 나는 목표보다 훨씬 좋은 기록으로 10km 완주에 성공했지만, 엄격한 나의 자기는 이 과정에서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 건 1) 크루들의 빠이팅 넘치는 고함 2) 옆에서 우루루 달리는 무리/떼의 효과 3) 간식을 향한 집념 같은 것이었다. 페이스를 체크하며 더 빨리, 더 느리게를 나에게 강제하지 않았고 걷지 말라거나 쉬지 말라는 압박도 스스로에게 가하지 않았다.


못해도 주 2회는 달렸던 지난 3개월이 무색할 만큼, 나는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달리면 잡생각이 안 나.”라는 말을 이해했다. 그간 나는 달리면서도 너무 많이 재고 따지며 그날 그날의 성취도를 지나치게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라톤 이제 1회차, 나보다 빨리 들어온 오조 오억 명의 러너 분들이나 나 자신에게 어떠한 열패감도 없었던 오늘의 경험이 오래오래 기억됐으면 좋겠다. 나 자신에게 특히 엄혹한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이룬 작은 성취에 온전하게 몰입하여 기뻐했던 소보로빵 맛의 수다를 그래서 이렇게 적어둔다. 잔인하게 굴지 말라고, 자기애로 행복감이 폭발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라고.




아직도 뿌듯함이 폭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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