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로서 못 할 짓

by Anima

아침 일찍 이사를 하기로 했다.

아이들은 할머니네로 보내고 장과 내가 남았다.

장은 어제 돈을 받았으니 안 나갈 이유가 없다.

얼마 되지도 않는 장의 짐은 우리가 나간 뒤에 자기 차로 옮기기로 했다.

두 명의 남자와 주방 담당 여자 한 명이 와서 부지런히 짐을 포장했다.

짐을 따로 챙기는 것을 보고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하는 것 같았다.

이제까지 그런 집이 한두 집이었겠나.


처음 분양받고 13년 이상을 살았던 집이라 짐이 많이 늘어 옷과 그릇, 낡은 책상 등을 버렸지만

내 책과 애들 책이 많았다. 전에 사두었던 크고 단단한 책꽂이가 있어 책은 한 권도 버리지 않았다.

장은 주식에 관한 책과 영업에 관련된 책을 모두 버리라고 했다.


바로 옆 동이라 이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우두커니 서 있던 장이 먼저 나가고 나는 부동산으로 가서 잔금과 열쇠를 주고받았다.

이제 장과는 얼굴 마주 볼일이 없다.

그의 목소리도 들을 일이 없다.

할 말이 있으면 문자로 주고받기로 했다.


전 남편, 이 진상과 1년도 못 살고 별거 6년 만에 헤어졌다.

새파랗게 젊은 남자 장 자성과 만나 사랑이란 이름으로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고 파란만장한 18년을 보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일찌감치 외도로 빠진 장, 월급 명세서 보는 게 소원이었던 날들, 양복 입고 넥타이 맨 남자가 내 남편이었으면 했던 날들, 말이 안 통하니까 폭력으로 의사 표현을 한 장, 애들과 놀아주는 아빠를 바랐는데, 경제적으로 무책임하면 집안일이라도 하기를 바랐는데,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기가 그렇게 어려웠나,

내가 지나친 욕심을 부린 걸까?


그럼에도 아이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또 이혼은 하기 싫어 별거를 택했다. 이혼이라는 딱지를 두 번 붙이기 싫은 나를 방어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 순간에도 애들 결혼할 때 법적인 부부니까 혼주 자리에 같이 앉아야겠지, 그쪽 집안 행사에는 애들을 보내야겠지, 시어른들이 손주들은 보고 싶어 할 테니까...... 별별 생각을 미리 한다.

대학생인 주성과 고등학생인 현아를 불러 앉혔다.

이제 아빠랑 떨어져 사는 거야.

그래도 아빠 보고 싶으면 연락해서 만나고 할아버지, 할머니네도 가.

이혼이 아니야. 여러 가지 문제로 따로 사는 거야.

나는 아빠 안 보고 싶은데.

따로 사는 건 싫지만 이미 결정한 거잖아.


너희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폭력이 있을 때 주성의 손으로 아빠를 경찰에 신고하게 만들고, 아직 아빠에 대해 측은한 마음을 품고 있는 현아에게 못 할 짓을 하고 있다.

며칠 후 오피스텔을 얻어 자리 잡은 장에게 문자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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