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의 시간

by Anima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려 시집에 전화를 했다.

먼저 시모가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 저예요.

드릴 말씀이 있어 전화드렸어요.

잠깐 있어 봐.


시모는 들어 보지도 않고 전화를 시부에게 돌렸다.

무슨 얘기를 할 줄 알고 그랬을까.

나다. 무슨 일이냐?

전화로 이런 말씀드리기 죄송한데 저와 주성 아빠,

이제 떨어져 살기로 했어요.

그럼 이혼하겠다는 말이냐?

우리의 불화를 짐작하고 있는 듯 담담한 목소리였다.

이혼한다는 건 아니에요.

제가 치매 걸린 어머니를 모시려고 집을 내놨어요.

내일이 이삿날인데 그 사람이 안 나겠다고 해서 아버님께 도움을 청하려고요.

그 사람이란 말은 듣기 싫구나.

둘이 해결해야지 내가 무슨 힘으로 그걸 해결하니?

제가 그동안 어떻게 생활했는지 말씀드린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18년 동안 생활비 제대로 준 적이 없고, 게다가 바람까지 피웠어요.

좋은 아빠 노릇도 안 했어요. 의지하며 살 수가 없어요.

어머니도 치매 증상이 있어 제가 모셔야 해요.

일이 잘 안 풀리는 걸 어떻게 하겠니. 참고 살다 보면 좋은 일이 있겠지.

어쨌든 결혼했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같이 살아야지 이제 와서 못 살겠다니 무슨 일이냐.

내가 무슨 힘이 있겠니? 둘이 알아서 해라. 끊는다.

평생 번듯한 직업 없이 최근에야 친구가 하는 부동산사무실에서 소일하며 지낸다는 시부와 아들 둘에 딸 둘 낳고 살고 있는 시모와 나를 비교하면 존경심이 절로 난다.

시모가 분식점을 차려 생활을 해온 형편에도 반찬이 마음에 안 든다고 밥상을 엎은 적이 있다고 들었다.

한 번의 폭력으로 사람 취급을 안 하던 나라면 두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장의 과오를 담담히 들으며 나 몰라라 하는 시부는 18년 만에 못 살겠다 뛰쳐나오는 나 같은 여자 안 만나고 무던히 참고 사는 강인한 생활력의 시모와 만났기에 50년 해로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아들을 알려면 그 아비를 보랬는데 비슷한 무능과 무책임의 길을 걷고 있는 부친과 장이 어쩌면 그렇게 닮았을까, 맹목적인 사랑에 빠져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 장 자성의 아들인 주성은 절대로 그런 아비를 닮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시부모 입장에서는 둘째 아들도 이혼한 지 얼마 안 됐는데 큰아들마저 헤어져 살겠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겠지만 내가 시부모의 마음까지 헤아리기엔 너무 지쳐버렸다.


시부모에게 도움을 청하려던 것도 무위로 끝났으니 다른 대책을 세워야 했다.

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일 아침 9시에 이삿짐 옮기기로 했어.

바로 새 주인 이사 올 거니까 준비하고 나가.

난 1,000만 원 가지고는 못 나가!

정말 이렇게 나올 거야?

오피스텔 보증금이면 됐지, 전셋집이라도 얻겠다는 거야?

오피스텔 얻고 일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할 것 아니야.

그것까지 내가 줘야 하니?

4,000만 원만 줘. 그럼 나갈게.

3,500만 원 보낼게.


지친다, 지쳐. 그렇게 해.


정작 지친 사람은 나다.

딴소리 하기 전에 즉시 3,500만 원을 보내고 내일 나가기로 다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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