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루 그 남자

by Anima

다른 길잡이가 저녁 번개로 남산둘레길을 걷는다 해서 참가 댓글을 달았다.

기다려도 다른 사람은 없고 남자 길잡이와 나뿐이다.

그렇다고 취소하지 않는 나처럼 그도 취소하지 않았다.

자주 길에서 만나는 사이라 불편하지 않은 관계였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날이 끄무레하고 저녁 걷기라 우산을 챙겨 들었다.

명동역에서 5시 출발이라 4시 40분쯤에 충무로에서 4호선으로 환승하려고 서 있는데

누가 뒤에서 소리를 지른다.


카톡도 안 봐요? 카톡도?


깜짝이야, 어떻게 여기서 만나요!

비가 와서 취소해야겠어요.


비가 와요? 그렇다고 취소해요?

만나기 20분 전인데.....

우산도 있잖아요.

나 우산 없어요. 오늘 길은 취소해요.

그래요? 그럼 저는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혼자 걷고 갈게요. 다음에 봐요.


그리고 바로 오는 전철을 타고 명동역에서 내렸다.

갑작스러운 취소였지만 그때까지는 화가 나지 않았다.

단지 걸으러 나온 시간이 아까워 혼자라도 걷고 들어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길로 간 줄 알았던 그가 전철 문이 열리자마자 어느새 빠른 걸음으로 내 앞을 질러갔다.

아니, 언제 탄 거야!

말을 걸 사이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남산 진입로로 들어서는 그를 불렀다.


화났쓰님, 같이 가요. 우산도 없이 가면 어떻게 해요.

같이 쓰고 가다 편의점에 들러서 우산을 사면 좋으련만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쌩 가버렸다.

그의 흰 셔츠 입은 등이 다 젖어 시스루가 되었고 원래 곱슬인지, 파마머리인지 모를 머리카락은

꼬불탕꾸불탕 제멋대로 춤추기 시작했다.

북측 순환로에서 시작된 남산길은 계속 비가 내리고 저녁 시간이라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주위는 점점 어두워지고 혼자 걷자니 겁이 나기 시작했다. 무서버......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카톡을 해도 읽지 않는다.

화가 나도 단단히 났고 심술이 났는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작전인가 보다.


그를 따라잡으려고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생각하니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20분 전 취소라 혼자 걷겠다고 했는데 뒤 따라와서 화가 난 듯 빨리 가버리는 것은 뭔가?

길잡이로서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것인지, 오기가 나서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빗속에 경주를 해야 할까, 우산을 씌워 주려해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에이, 모르겠다. 나도 빨리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걸음을 재촉하는데

저쪽에서 시커멓고 희끄무레한 몸뚱이가 다가온다. 엄마야!

자세히 보니 화났쓰다. 남산 남측진입로에서 유턴한 듯하다.

나를 보고도 모른 체하고 가버린다.

어쭈? 이제 나도 너처럼 화났쓰!


이제 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하니!

겨우 따라잡아서 바로 보이는 남산한옥마을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저는 이쪽으로 갈게요. 고생하셨어요.

막상막하 고집부리다가 고생고생 개고생도

이런 고생이 있나!

혼자 걷고 갈 테니 그냥 가라고 했는데

나 따라올 줄 알았나?

그의 흰 셔츠는 흠뻑 젖은 시스루에,

머리는 메두사처럼 저마다 일어났다 축 처지고

나는 나대로 어둠이 주는 두려움에 떨며 걸었다.

길잡이 혼자 걷는 게 안쓰러워 동정표를 지니고 나왔건만 이런 대접을 받을 줄이야!

유연하고 참을성 있는 다른 여자들처럼

이럴 걸 그랬나?

어머, 비가 와요? 몰랐네요.

우산도 안 가져오셨다니 못 걷네요.

괜찮아요. 그럼 다음에 걷지요, 뭐.

고생하셨어요. 안녕히 가세요.

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