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
우산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한참을 말없이 걷다, 제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때도 넌 항상 나보다 반 발짝 뒤에서 걸었어."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래야 네가 어디로 가는지 볼 수 있으니까."
제이가 웃었다. 예전처럼. 그 웃음은 여전히 나를 헷갈리게 했다.
"여기 아직도 있네."
제이가 멈춰 섰다. 오래된 분식집 앞이었다. 낡은 간판, 김이 서린 창, 같은 자리, 같은 메뉴.
제이가 물었다.
"라면, 먹고 갈래요?"
"지금 '봄날은 간다' 따라한 거야?"
나는 웃으며 멈춰 섰다. 그리고 제이를 보며 되물었다. 제이가 대답했다.
"아니. 나 라면 먹고 싶어서."
"그래. 나도 라면 먹자."
나는 문을 열었다.
딸랑, 종이 울리는 소리가 뒤따랐다.
안은 따뜻했다. 김이 자욱하게 올라오는 조리대, 벽에 붙은 낡은 메뉴판, 그리고 반쯤 찬 물컵들이 흩어진 테이블.
제이는 아무 말 없이, 창가 쪽 가장 구석진 자리에 가 앉았다.
우리가 예전에도 늘 앉던 자리였다.
나는 그 맞은편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여기 앉으면, 바깥에 비 오는 거 잘 보이거든."
제이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봤다.
비는 아직 그치지 않았고, 우산들 사이로 사람들이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그 장면에서 이영애가 했던 대사는 '라면 먹고 갈래요'가 아니야."
제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진짜? 그게 아니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냥, ‘라면, 먹을래요?’ 였어. 근데 사람들은 다 '라면, 먹고 갈래요?'로 기억하더라."
제이가 피식 웃었다.
"기린은 여전하구나. 모든 것을 기억하네."
나는 잠시 웃고, 제이를 바라보았다.
"약속했었잖아. 언제까지나 기억하겠다고."
제이의 표정이 잠시 흐려졌다가 다시 웃음기를 되찾았다.
"그때 얘기를 하는 거구나. 난 다 잊은 줄 알았는데."
"말했었잖아. 난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고. 한번 읽은 문장은 잘 잊히지가 않아."
라디오에서는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왔다. 사랑하는 남자를 떠나보낸 여자가 그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내용의 가사였는데, 제목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제이가 물었다.
"그래서, 기린, 기린은 지금 뭐 하고 살아?"
나는 노래의 제목을 기억하는 것을 포기하고 창밖을 바라봤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가끔 쓰고. 그게 다지."
"쓰고?"
"글. 뭐, 그냥 나 혼자 보는 거."
"그럼 아직도 시를 써?"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라기보단 메모에 가까워. 너처럼 시집 사는 사람한테 보여줄 수 있는 건 아니고."
제이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때 썼던 시, 아직 있어?"
나는 웃었다.
"없애버렸어. 네 얘기가 너무 많아서."
제이도 웃었다. 그 웃음엔 약간의 미안함과 약간의 따뜻함, 그리고 그 이상은 없었다.
제이가 젓가락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아직 있어. 네가 썼던 시, 내가 몰래 복사해 뒀던 거."
나는 고개를 들었다.
"진짜?"
"응. 그중에 한 편은 아직도 서랍 속에 있어. 누군가 나한테 '기린이 누구야?'라고 물으면, 그냥 웃기만 했지."
내가 물었다.
"그 시, 제목이 뭐였더라. 기억나?"
"다른 이야기."
"아니야. 그 시의 제목은 '다른 이름'이었어."
"진짜?" 제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응."
"이상하다... 나는 '다른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어리둥절해 하는 제이에게 내가 말했다.
"너는 제목보다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이니까."
"너는 제목부터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이고."
그렇게 말하며, 제이가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나는 숨을 조금 늦게 쉬었다.
*
계산을 마치고 나오자, 비는 조금 잦아들어 있었다.
"너희 집 쪽은 이 길이 아니지?" 내가 물었다.
"응. 근데 괜찮아. 오늘은 좀 걸어도 될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내일 뭐해? 기린?"
말없이 걷는 길 위에서, 내일은 무엇을 할지 생각하다 나는 이내 두더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두더지는, 오늘도 어딘가에서 흙을 파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교묘한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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