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어디에나 있을 법한 모습의 총무가 후리스와 분홍색에게 인사를 했다. 후리스와 분홍색이 웃으면서 총무에게 인사를 하고 복도를 따라 열람실로 사라졌다.
“안녕하세요.”
내가 말하자 총무가 이어폰을 빼고 고개를 들었다.
“자리 있나요?”
총무가 무표정하게 마우스를 깔짝댔다.
“자리 있나요?”
“보구요.”
빌어먹을 왕자님 납셨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총무님께서 위대하신 클릭 질을 마치실 때까지 나는 그의 앞에서 대기했다. 우산에서 물이 떨어졌다.
“벽 자리 하나 있어요.”
그가 내민 종이에 내 인적사항에 대한 걸 빠짐없이 적어넣었다. 왕자님이 말씀하실 때는 왕자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따라야하니까.
손에 맺혔던 물이 떨어져 잉크 위에서 번졌다. 줄을 긋다가 종이가 찢어졌다. 그 위에 다시 이름을 적어넣었다. 글자가 다시 번졌다.
“따라오세요.”
놈이 안내해주겠다며 앞장을 섰다. 카운터에서 일어난 놈을 보니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총무들은 대게 이런 식이다. 놈들은 아주 화려하지도 아주 촌스럽지도 않은 종류의 뿔테 안경을 쓴다. 촌스럽지도 않고 눈에 띄지도 않는 그런 식의 안경을 놈들은 어떻게 그렇게 잘 찾아내는지 모르겠다. 놈들은 어쩜 어떤 안경이 독서실에서 제일 잘 어울릴까에 대한 고민을 하루에 스무 시간 이상씩 하는지도 모른다. 누가 지들한테 관심이나 있는 줄 아나. 아무튼 그렇다.
놈들은 한 뺨 정도로 머리를 짧게 자르고 왁스 칠을 하고 다닌다. 놈들이 관심있는 건 오직 상체뿐이다. 왜냐하면 하루종일 앉아서 사람들을 맞아줘야 하기 때문이다. 놈들은 하체에는 관심이 없다. 밑에 뭘 입었는지는 책상 아래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반만 연예인인 놈들.
총무가 내 앞에서 총총거리며 걷는데 회색 츄리닝 바지가 자꾸 흘러내렸다. 두툼한 엉덩일 씰룩거리며 걷는 왕자님 모습을 보자니 당장 달려가 내 벨트라도 풀어드리고 싶었다. 물론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돈을 아끼기 위해 총무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한다는 짓은 위대한 짓이기도 하다. 나는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그런 위대한 짓을 하면서 시험에 합격한 총무들은 위대한 공무원이 될 꺼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저기에요.”
총무가 지목질을 하고 사라졌다. 나는 가방을 매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어 들어갔다. 빼곡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돼지들이 꿈쩍도 안 하고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자 옆자리의 군인 머리가 움찔거렸다.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예민한 새끼.
열람실 안에는 꼬랑내가 진동을 했다. 축구공부터 도시락통, 장기판, 담요까지 지저분한 구석에는 없는 거 없이 다 쑤셔박혀 있었다. 더러운 곳에 더러운 놈들이 다니니 더러운 냄새가 날 수 밖에. 티슈를 꺼내 바닥을 닦았다.
벽에 손을 대자 흰 페인트가 젖어서 부서져 내렸다. 벽이 차가웠다. 벽 속에는 회색 내벽이 숨겨져 있었다.
자리에 앉아 의자를 점검해 보았다. 독서실 새끼들은 미칠 듯이 예민하다. 의자를 끌다가 소리를 내거나 볼펜을 조금만 따각거려도 자리를 비운 사이에 미친 듯이 포스트잇으로 도배질을 해놓는다.
'부탁드립니다. 조용히 해주세요.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부탁이니까 조심하라는 경고장을 받으면 소리가 날까 봐 신경이 쓰여서 숨도 제대로 못 쉰다. 숨도 제대로 못 쉬다 나중에는 질식할 것 같아서 당장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지경이 되어버린다. 그런 건 정말 질색이다.
쩌겅.
의자를 젖힐 때 등받이에서 소리가 났다. 어떡하지. 바꿔 달라고 말을 해야 하나. 의자를 여러 번 흔들어 보았다.
쩌겅. 쩌겅.
옆자리의 군인 머리가 나를 보길래 가볍게 목례를 했는데 놈이 해병대처럼 손가락을 자기 입술에 갖다 붙였다. 재수 없는 새끼. 군인 머리가 다시 정면을 봤다. 의자를 바꿔달라고 할까 하다가 그냥 그러지 않기로 했다.가방 속 책들을 죄다 책상에 늘어놓았다.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책장에 옮겨 넣다가 자물쇠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부하는 놈들 중엔 도둑놈들이 더럽게 많단 말이다. 이 도둑 새끼들은 처음엔 노트를 훔치고 책을 훔치다 나중에는 지우개 똥까지 훔쳐간다. 책들을 다시 가방에 부리고 열람실을 나왔다. 돼지들이 자리를 비켜주지 않아서 의자를 밀치며 지나갔다.
현관을 나서는데 총무가 고개를 들었다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빌어먹을.
어떤 새끼가 그새 내 우산을 훔쳐갔다. 아무 우산이나 집히는 대로 잡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었다. 닫히던 문이 열리자 어떤 얼간이가 짜증섞인 표정으로 닫힘 버튼을 스물 다섯 번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간신히 일 층에 도착해서야 가방을 안 매고 나왔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다시 올라갈까 하다가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을 매고 또 비오는 데를 걸어갈 생각을 하니 죽고 싶어져서 그냥 가기로 했다. 골목을 걸으면서 사람들과 부딪쳐서 우산살의 물방울이 튀었다. 인간들이 굼벵이처럼 느리게 움직였다. 인간들 사이를 비집으면서 가방 지퍼를 채웠었나 안 채웠었나를 십분 넘게 기억하려 했다. 기억나지 않았다.
딸랑.
마법사처럼 늙은 노인이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 물건을 사고 있었다.
“열세 자리 있나요?”
“사천 육백 원이요.”
“열세 자리 있냐고요?”
“봉지 필요하세요?”
알바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앞에 있는 노인에게 지껄였다. 나는 어정쩡하게 노인과 점원 사이에 서서 노인이 잡다하게 늘어놓은 식료품이며 칫솔 따위를 계산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노인이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알바생한테 건내 주는데 십 년도 더 걸리는 것 같았다. 노인이 느린 손으로 동전을 하나하나 헤아렸다.
'이봐. 늙은이. 당장 필요한 걸 챙겨서 여길 떠. 안 그럼 바람구멍이 날 거야.'
나는 후드티 앞주머니에 손가락을 찔러넣고선 불룩 튀어나오게 하곤 속으로 생각했다.
'니 도란나. 니 빨 가라.'
홍두가 있었다면 이렇게 받아 줬을 거다. 그런데 지금 홍두는 없다. 홍두가 어디있는진 모른다. 어디있냐고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노인이 떨리는 손으로 봉지를 받고선 천천히 내 앞을 지나갔다.
“뭐 필요하세요?”
천 백년 만에 점원이 나에게 물어봤다.
“열세 자리요.”
“뭐가요?”
“열세 자리요.”
“뭐가 열세 자린데요?”
점원이 물었다.
어떤 점원들은 더럽게 친절하다. 물론 그렇지 않은 점원들도 존재한다.
“자물쇠요. 열세 자리.”
“열세 자리 자물쇠가 있어요?”
“있나요?”
내가 물었다.
“저쪽에 찾아보세요.”
점원이 편의점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점원이 가보라고 지시한 곳으로 가서 위부터 아래까지 마흔다섯 번 이상 물건을 찾아보았다. 생리대, 고무장갑, 양말, 속옷, 화투까지 다 있었지만 자물쇠는 없었다.
"없는데요?"
내가 점원을 향해 크게 소리질렀다.
"거기 말고 그 반대편이요."
알바생이 말했다.
진작에 제대로 말할 것이지.
입술이 땅에 닿도록 구차하게 허리를 굽히고 진열대를 다시 뒤졌다.
"없어요."
“그럼 없는 거에요.”
어떤 알바 새끼들은 더럽게 친절하다. 물론 그렇지 않은 알바들도 존재하지만.
우산을 들고 가게를 나왔다. 사람들이 걸리적거려서 우산을 내팽개치고 독서실로 뛰었다. 후드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비가 많이 오네요. 화약 연기들은 잘 쓸려나가고 있으려나요. 우리나라는 일기예보도 정확하지. 우리 나라 좋은 나라. 감기 조심하세요. 글을 오래 쓰면,
허리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허리 잘 챙기세요~~ 오늘도 격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