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생각해봐. 애송이."
그가 말을 붙였다.
"그들이 원하는 건."
"너의 비급이야."
더는 그가 말을 붙이지 않았다.
*
스승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잘 살려면 똑똑해야 한다고, 아니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아니 상대에게 기꺼이 머리를 내어주는 칼을 쓰라고.
나는 오늘도 알 수 없는 그 말의 의미를 새기며 출근을 한다.
알 수 없는 것과
알 수 없는 것들 사이로
알 수 없는 나를 비집으며.
*
흡.
이제 제법 공력이 붙어 출근길 따위는 두렵지 않게 되었다.
_만근추(萬斤錘)
밀려드는 인파 속에서 무게를 묵직하게 내려 자리를 잡았다.
_반탄공(反彈功)
뒤에 밀착하여 내공을 빨아먹는 흡성마공을 방어하는 데에도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_축골공(縮骨功)
뼈 마디마디를 재조합해 미끄러지듯 인파 속을 헤치는 일도 식은 죽 먹기다.
_축지심(縮地心)
계단과 계단 사이. 걸음과 걸음 사이를 줄여 돌진하는 데에도 문제가 없다.
세이프.
출근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이제 나에게.
정시 출근은 식은 죽 먹기다.
"대리님 오셨어요?"
어라? 나주임이 인사를 한다. 웬일이지. 출근길만큼이나 사무실 분위기도 밝다.
"장수씨 왔어?"
오팀장이다. 웬일인가. 그가 웃으면서 출근을 한다. 웃으면서 책상에 앉고 웃으면서 컴퓨터를 켠다. 이럴 수가. 게다가 오늘은 월요일이지 않은가.
"어머, 이대리. 오늘 핏 너무 좋다. 왜 이렇게 멋져? 요새 연애해?"
정미인이다. 정미인이 왜 나를 보고 웃지? 불안하다.
불안하지만 기분은 좋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대륭산업 후진사업부 3팀.
우리 팀은 옥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륭의 누구도 찾지 않는 곳. 누구도 우리에게 일을 주지 않는다. 누구도 우리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 누구도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박부장의 불편한 시선도. 옆 부서의 열일하는 긴장감도. 이곳엔 없다. 우리는 옥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히려 땡큐다.
"좋다. 한 달간의 말미를 주지. 달포 안으로 비급을 가져와라. 그전 까지 팀의 해체를 유보하마."
박부장이 말했다.
주과장의 말을 듣고 나는 곧장 박부장에게 달려가 비급을 주겠다고 말했었다. 다만 비급이 아직 수정 중이니 완성도를 위해 시간을 좀 더 달라고도 말했다. 스승의 유지니 무림의 정순한 기운이니 뭐 그딴 거. 씨알이나 까먹으라지. 난 알빠노다. 월급만 받으면 그만이지.
팀원들은 오히려 좋아했다. 해체 위기에서 벗어난 내막은 모르는 듯했으나 어쨌든 감사실에서 벗어났고 월급도 그대로 나왔다. 오히려 일을 시키는 사람도, 성과를 압박하는 사람도 없었다. 옥상으로 휴가라도 온냥 다들 만족해했다. 루팡마냥 월급을 빼먹었다. 그야말로 천국. 모든 직장인들의 꿈이 아닌가. 나 역시 천년만년 이 호사를 누리고 싶었다. 갑자기 대륭이 좋아졌다.
"이대리. 잠시. 밖으로."
모두가 만족해하면 꼭 누군가는 불편해하기 마련이다 이곳에선.
주과장이 그랬다.
주과장이 나를 불렀다. 목소리가 평소처럼 낮았다. 팀원들이 히히덕 거렸다. "와 옥상이니까 휴식시간도 맘대로네. 정차장. 정차장도 나가서 바람 좀 쐬어요. 여긴 내가 맡을 게." 오팀장이 말했다. "팀장님이 먼저 쉬셔야지요. 팀장님이 우선이죠. 회사 안짤리고 편한 부서로 발령받은 게 다 팀장님 덕분인걸요. 호호호."
뻘소리들을 뒤로하고 나는 주과장을 따랐다. 주과장이 성큼성큼 앞을 질렀다. 옥탑 난간 너머로 대륭 본사의 거대한 그림자가 작은 주택들을 누르고 있었다.
"정말 비급을 넘길 샘인가?"
주과장이 물었다.
이 인간. 그때 베었어야 하는 건데. 성가시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아직 완성 못했다구요. 비급을 넘기지 않으면 모두 짤리게 생겼는데. 대체 과장님은 뭐가 불만이신 겁니까?"
"비급이 완성되면..."
"정말 넘길 작정인가?"
주과장이 다시 물었다.
"네. 그럴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천년만년 호사를 누리고 싶습니다. 그게 제 바람입니다."
"비급을 넘기면 대륭의 힘은 더 걷잡을 수 없게 돼. 무림의 기강은 돌이킬 수 없게 될 꺼야. 오온이 너에게 그렇게 가르쳤나?"
나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 않겠다고 결심했다.
"상관없습니다. 열심히 써봤자 아무도 읽어주지 않고. 혼자서 애써봤자 누구도 좋아해 주지 않아요. 그런 비급 따위. 달라는 사람에게 줘버리면 그만이죠. 혼자서 애가 끓는. 제 마음을 과장님은 아십니까?"
내가 외쳤다.
주과장이 고개를 숙였다.
바람이 세게 옥상을 쓸었다.
주과장이 말했다.
"타락했군."
이어.
"초라해."
그가 말했다.
순간.
왜 인지 울음이 나오려고 했다.
나는.
울음을 참고 말했다.
"타락한 게 아닙니다."
내가 말했다.
"철이 든거죠."
주과장은 대꾸하지 않았다. 남은 기간은 열아흐레. 책상에 앉았으나 글이 써지지 않았다.
오늘은 정말 눈이 오네요. 눈이 쌓인 나뭇가지가 아름다워요. 오늘 하루도 힘내세요. 응원합니다.
<이미지는 다케히코 이노우에 님의 배가본드에서 가져왔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