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15화

by 빈자루

*

"소소야, 이제 집에 가자아."


장수는 벌써 몇 시간째 소소에게 떼를 쓰고 있었다.


"소소야, 아빠 배고파. 이제 그만 가자아."


젊은 시절. 밥 한 공기를 먹고서도 산 하나를 들어 옮길 수 있을 정도로 기운이 왕성했던 장수였다. 하지만 어느덧 그의 나이는 중년. 이제는 놀이터를 조금만 돌아도 당이 떨어져 머리가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소소야, 아빠 힘들어. 제발 들어가자아."


그런 아빠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소는 아랑곳없이 놀이터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현대의 놀이터는 지옥이었다. 놀이터의 끝은 다른 놀이터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 놀이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들어가는 이의 자유였지만, 나올 때에는 나오는 이의 자유가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놀이터는 다른 놀이터로 반드시 이어져 있었다. 그것은 장수에게 빠져나올 수 없는 무한지옥과도 같았다.


"소소야! 아빠 배고프다고 했잖아! 왜 말을 안 들어!"


순간 장수가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하고 버럭 내뱉었다.


아이가 움찔하는 모습을 보자, 장수는 아차 싶었다.


소소가 울먹울먹한 눈망울로 아빠를 빤히 쳐다봤다.


"아빠, 배고파?"


"응, 소소야. 아빠 배고파." 장수가 금세 미안한 듯 아이에게 사정하듯 말하였다.


"그럼 밥 먹고 와."


소소는 그렇게 말하고 홀연히 미끄럼틀 속으로 사라졌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장수는 터덜터덜 편의점을 향해 걸어갔다. 돌아오는 길 그의 손엔 삼각김밥 하나가 들려 있었다. 저물어 가는 해를 보며 장수는 홀로 벤치에 앉아 삼각김밥을 씹었다. 사형...


장수가 조평과의 수련에 몰두해 있던 무렵, 무림도 점차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

"대관절 이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무림맹주의 문장을 새긴 붉은 도포가 신중하게 바닥을 쓸었다. 노장의 손끝에서 가볍게 떨리는 찻잔이 그의 분노를 전하고 있었다.


"소림 외곽의 사찰이 전소되었습니다. 고승 열세 명 중 돌아온 이는 셋뿐입니다."


"개경에서 정파의 아이들이 납치된 것이 벌써 세 번째입니다! 언제까지 사파 놈들의 횡포를 방관하실 겁니까!"


당루에 모인 원로들이 저마다 소리를 높였다. 정파의 거친 물결이라 일컬어지는 하맹천이 제 키만 한 패도를 바닥에 찧으며 말했다. 하맹천의 검은 수염이 패도의 칼날 옆에서 부르르 떨렸다.


"지금 당장 사파 놈들을 쓸어버리지 않으면, 무림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맹주."


하맹천의 말을 들은 정사홍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정파는 이미 두 차례에 걸친 정사대전으로 많은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저 성급하고 사나운 하맹천의 말대로 단번에 사파를 쓸어버릴 수 있다면 그만이지만 정파 역시 그만큼의 피해를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무림맹은 전쟁의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이들, 계산에 어둡고 불평만 늘어놓을 줄 아는 장로들이나 힘만 쓸 줄 아는 무골들이 아니었다. 맹주의 입장에서 사홍은 군사들의 배를 채울 식량, 허물어진 산채를 다시 일으킬 자재와 인력, 그리고 이름도 모를 용병들에게 건네야 할 노패(勞牌)와 금전을 생각해야 했다. 무엇보다 현재로서는 2차 정사대전 이후 바닥을 드러낸 무림맹의 재정을 메꾸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 사홍의 속을 이들 무사와 문사들이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


"전쟁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오. 우선 양민들에게 거두는 세를 두배로 올리고, 강남상단에 서찰을 띄워 놓으시오. 내 친히 상단에 논의할 것이 있노라고."




*

"흥, 배부른 자들이 배부른 소리를 하는 군."


어둠 속에서 거대한 체구를 한 사내가 익히지 않은 노루 고기를 씹으며 말했다.


"납치 사건도 정파 내부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자신들 내부의 화살을 우리 쪽으로 돌리려는 것이지요."


검은 가면을 쓴 남자가 태휘의 거대한 신체를 보며 말했다. 태휘는 피로 얼룩진 손으로 고기를 찢고 있었다.


"늘 그런 식이지. 그런 짓거리나 하면서 아직도 정의를 입에 올리는 놈들이지."


태휘가 낮고 거친 목소리로 내뱉었다.


검은 가면 아래, 차가운 눈빛이 번뜩였다. 사파의 그림자라 불리는 남자, 암영은 고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의는 그들에게 옷깃 같은 것이지요. 피가 묻어도 금세 갈아입는."


태휘가 고기를 찢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사인에게 연락을 취해봐야겠군."


암영이 잠시 침묵하다 조용히 말을 이었다.

"련주님께선 이미 태백산 방면에 명을 내리셨습니다. 사도연합은 이미 움직이고 있지요. 하지만..."


암영이 어둠 속을 바라보며 말소리를 이어갔다.


"정파는 세금을 올렸습니다. 질서 유지와 보호비라는 명목으로, 소작농들의 쌀자루까지 가져가고 있지요."


태휘는 피 묻은 손으로 고기를 삼키며 말했다.


“그래서 우린, 부자들만 친다.”


암영이 피식 웃었다.


“양민은 건드리지 않는다. 정파처럼 그들의 고혈을 짜는 짓은 우리 체질에 안 맞지.”


태휘가 고개를 들었다.


"기름진 창고를 털고, 그 곡식을 산 아래로 흘려보내는 게... 우리의 방식이지."


검은 가면 아래로, 암영의 눈이 얇게 가늘어졌다.


"물론, 가진 자들은 피를 보게 되겠지요."


태휘가 말했다.


"내놓지 않으니, 빼앗는 것뿐이야. 그 과정에서 피를 보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야..."


멀리서 산장 안쪽으로 등불이 깜빡이고 있었다.





*

산골 마을, 불안한 눈빛으로 아이를 안은 여인이 속삭였다.


“요즘 길에 나서면 도적떼도 많고, 누가 옆길에서 칼 빼들지 몰라 겁이 나요.”


“정파와 사파가 싸운다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저 피만 흘릴 뿐입니다.”


“낮에는 정파가 빼앗아 가고, 밤에는 사파가 저희를 앗아 갑니다. 대체 저희는 어디를 믿어야 한단 말입니까?”


양민들은 집 한 켠에 정파를 뜻하는 휘장과 사파를 뜻하는 휘장을 모두 준비하여 번갈아 가며 그것을 걸었다.


사람들 사이에도 의심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웃의 눈빛은 차가웠고, 말 한마디에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에 모두가 숨을 죽였고, 낯선 방문객은 곧바로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 지나간 자가 정파인지, 사파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소? 다들 속에 칼을 품고 걷습니다.”


“요즘은 같은 마을 사람도 믿기 어렵다오. 누가 뒤통수를 칠지 모른다고.”


“옆집 아들도 며칠 전부터 말이 없더니, 어젯밤엔 마을 밖으로 끌려갔다는 소문이 돌고 있소.”


서로를 향한 의심은 점점 더 깊어져, 불신은 사람들의 심장을 옥죄었다.


길을 걷는 자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아무리 가까운 이라도 날카로운 눈초리로 상대를 가늠했다.


“내 뒤에서 칼을 빼드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 숨이 막혀.”


“말 한마디가 곧 칼날이 되고, 눈길 하나가 독이 되어 돌아온다오.”


가장 가까웠던 이가 가장 깊은 배신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람들은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었다.


숨죽인 밤, 어디선가 울리는 아이의 울음소리에도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 울음마저 누군가의 함정일까 두려워, 아무도 도우려 하지 않았다.


신뢰란 이미 먼 옛날 잃어버린 것이었고, 사람들은 서로의 그림자만 보며 두려움 속에 갇혔다.


무림의 겉모습은 평온했지만, 사람들의 내면은 깊은 지옥 속에서 끊임없이 고통받고 있었다.


끝나지 않을 전쟁보다 더 잔인한 것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이들의 고독한 싸움이었다.


무림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힌 채, 서서히 불길 속으로 타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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