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번 읽은 책 리뷰]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내가 처음 이대로는 안되겠다 느낀 건 대학교 2학년 때. 페미니즘, 여성주의에 대한 논의가 지금만큼 활발해지기 전이었다.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던 어느 날 밤 10시쯤 이였나, 동아리 선배들의 전화에 집을 나섰다. 세 명은 모두 남자였고, 온갖 진보적인 척, 의식 있는 척 없는 꼴값까지 떨던 선배들이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화장도 하지 않은 채로 잠옷바지를 질질 끌고 집 앞 술집에 도착하자 선배들이 손을 들며 말했다.
"역시 술자리에 여자가 오니까 술 맛이 나네"
그 말에 나는 술 맛이 확 떨어졌다. 일단 앉아 잔에 술을 받자 건너편에 앉은 다른 선배가 말했다.
"나도 술 한잔 따라봐라" 나는 더 이상 앉아있을 수 없어서 잔을 놓고 그대로 뒤돌아 나왔다.
분명 평소에도 들어온 말인 것 같은데 수치심, 모욕감, 비참함, 슬픔, 짜증… 온갖 저질스런 기분이 몰려왔다. 술 따를 손도 없나 병신들. 큰 발걸음을 걸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 자리에서 아무 소리 못하고 그냥 나온 내가 한심했다. 그래서 책을 찾기 시작했다. 집어든 책은 표지가 분홍색인 것들이 많았고, 제목에 페미니즘, 여성, 역사 같은 단어가 많이 나왔다. 그리고 나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 경험을 말하고 다른 이의 경험을 통해 내가 인식하지 못했던 불편함을 알아차렸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거시적인 구조까지 우리 사회에 뿌리박힌 모순들은 산재해있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자잘한 계급단위 속에 여성은 가장 아래 자리 잡고 있었다. 유년기, 가정, 일터, 결혼, 출산, 육아로 이어지는 인생의 여정 속 여성에게 주어지는 이름은 너무도 많았다.
그리고 나는 조금씩 알아가며 내가 걷는 길을 인식하는 매순간마다 엄마가 떠올라 눈물이 났다.
이 책은 은유 작가, 꽃수레의 엄마이자 이 시대 한국사회의 여성이 쓴 산문집이다. 연분홍 표지와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샀다. 은유 작가는 딸을 꽃수레라 부른다. 이 책은 작가 본인과 그 딸, 엄마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주 담담하게 딸, 아내, 엄마, 글쟁이의 이름 속에서 '나'를 찾기 위한 투쟁을 그린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투쟁하는 과정 속에서도 작가는 사회의 뿌리박혀 여성을 핍박하는 인식, 시선에 불편함을 느끼고 상처받는다. 그럼에도 자신의 삶이 그 인식을 반영하지 못하고 내 엄마의 길을 반복하는 것에 불편함과 가족에 대한 미안함. 양가적인 감정을 느낀다. 그 삶을 솔직하게 말한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그간 나는 너무 쉽게 세상 여성들의 삶을 당연하게 바라봤지 않나, 이미 정해진 위계 안에서 홀로 안온하다 믿으며.
경험 하나는 큰 힘이 없다. 하지만 경험이 입 밖으로 나온 순간 그 것은 증폭돼 현실을 바꾼다. 그 경험들이 모여 세상은 바뀐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서 모든 것은 시작한다. 미친년 널뛴다는 말이 있다. 미친년을 미치게 만든 미친놈들의 존재가 생략된 채 사용되는 이 말은 폭력적이다. 책에서 이 구절을 읽고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이 세상에 이렇게 생략된 미친놈들의 언어가 얼마나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는가. 그리고 이렇게 사용되는 말 속에 억눌린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수많은 여성들의 나홀로 눈물은 어느 누가 보듬어 줄 것인가.
경험을 나누는 것에서 한걸음이 시작된다.
나는야 폴짝/ 김민정
줄이 돌아간다 줄 돌리는 사람 없이 저 혼자 잘도 도는 줄이 허공을 휘가르며 양배추의 뻑뻑한 살결을 잘도 썰어댄다 나 혼자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두 살 먹은 내가 개똥 주워 먹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다섯 살 먹은 내가 아빠 밥그릇에다 보리차같은 오줌 질질 싸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아홉 살 먹은 내가 팬티 벗긴 손모가지 꽉 물어뜯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열세 살 먹은 내가 빨아줘 빨아주라 제 자지를 꺼내 흔드는 복순이 할아버지한테 침 퉤 뱉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열여섯 살 먹은 내가 본드 불고 토악질해대는 친구의 뜨끈뜨끈한 녹색 위액 교복 치마로 닦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열아홉 살 먹는 내가 국어 선생이 두 주먹에 날려버린 금 씌운 어금니 두 대 찾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스물두 살 먹은 내가 두 번째애 떼러 간 동생 대신 산부인과에서 다리 벌리다 말고 폴짝 줄 넘 고 있었는데 스물다섯 살 먹은 내가 나를 걷어찬 애인과 애인의 그 애인과 셋이서 나란히 엘리베이터 타 오르다 말고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스물여덟 살 먹은 나 혼자 폴짝 줄 넘고 있었는데 줄 돌리는 사람 없이 저 혼자 잘도 도는 줄이 돌고 돌수록 썰면 썰수록 풍성해지는 양배추처럼 도마 위로 넘쳐나는 쭈글쭈글한 내 그림자들이 겹겹이 엉킨 발로 폴 짝 폴 짝 줄 넘어가며 입속의 혀 쭉쭉 뽑아 길고 더 길게 줄을 잇대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