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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 Mar 20. 2018

현대인에게 고향이란

그리고 나에게 고향이란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는 질문이 제일 곤혹스럽다.


 잠깐의 침묵 뒤에 “...이사를 워낙 많이 다녀서요라고 답하면 '그래도 고향은 있잖아?' 라는 표정으로 바라보기도, “아 그렇구나덤덤하게 바라보기도 한다.


 난 곳, 자란 곳, 공부한 곳, 직장을 얻은 곳, 결혼하고 자리를 잡은 곳, 아이들 교육을 위해 옮긴 곳, 그리고 노년 위해 앉은 곳… 어쩔 수 없이 옮기고 옮겨야 하는 시대에 우린 살고 있다.


 현대인에게 고향은 더 이상 어린 시절의 추억이 서린, 마음 속 깊이 품은 어머니 같은 장소가 아니다.


 금의환향도 없다. 명절에 부모님 계신 집에 꼬박꼬박 내려가는 것만 해도 효자라 칭찬한다. 일에 치이고 가족에 치이고 이때 만이라도 좀 자고 싶다 는 생각…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현대인들은 아예 부모님을 도시로 모셔오기도 한다. 넓은 아파트단지 안에는 낮에 편안히 햇빝을 쬘 만한 공간도 없다.


 해외여행은 늘었다. 한국은 명절에 활짝 열린 가게가 많아 외국인들이 놀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불빛이 번쩍번쩍한다. ‘저기 저 편의점 알바생은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는 걸까? 나처럼 내려갈 고향이 없는 걸까?’ 문득 멈춰 서서 생각했다.


 한 가지 분명하건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고향 상실의 시대라 한다.


 하이데거가 말하길 인간은 자신이 거주해야 할 고향에서 떠나 밤의 심연에서 유리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보기에 현대 세계는 기술 문명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고향을 잃어버리고 존재 의미를 상실해버렸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의 도구가 되어 버린 불안과 공허와 권태의 세계다.

 한국사회에서도 이미 고향이란, 장소의 개념을 상실한지 오래다.


 도시에서 나고 도시에서 자란 세대가 어른이 된다. 우리가 고향으로써 흔히 떠올리는 시골마을이 개발되고 공동화되어 예전의 모습을 잃어간다. 그리고 고향은 아름다운 신화 같은 것이 된다.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연어의 귀소본능처럼 인간은 자신의 근원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답을 얻고자 한다. 수구초심. 여우도 죽을 때 구릉을 향해 머를 두고 초심으로 돌아간다는데 인간에게 고향이란 이처럼 원초적 본능을 일깨우는 그리움의 원천인 것이다.


 고향의 흙 냄새.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 어머니의 품 같은 포근한 산천과 곳곳에 묻어둔 어린 시절의 사무치는 추억이 그립다. 태어나서부터 아파트에서 자 한번도 느껴본 적 없지만 나에게 고향이란 일곱가지 무지개 색으로 윤색되어 꿈꾸듯 다가온다. 20대가 본인들이 겪지 못한 이야기임에도 tvn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 열광한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태어난 곳에서 1년 반 후 사람 바글거리는 서울로, 교복입고 학교다닐땐 바다 보이는 포항으로, 좋아하는 남자애가 생겼을 무렵에는  마을로, 대학 좀 가보려고 공부할까 했더니 기죽게도 다시 서울로.


 스무 살도 이전에 나는 전국을 누비며 '고향이 어디냐' 물으면 어찌할 바 모르는 어른이 됐다.


 집을 떠나 대학에 와서는 다섯 평짜리 자취방이 내 세상이 됐다. 그래도 대학에 와서 주변을 보니 위안이 됐다. 나만 돌아갈 곳이 없는 게 아니구나. 부모님 계신 고향에 시험 때문에, 취업 때문에, 잔소리 때문에, 술 때문에. 어쨌든 다들 잘 안 가더라. 그렇게 점차 어른이 되고 기억과 고향은 희미해져 간다.


 고향이 없어진다는 건 기댈 곳이 없어진다는 것, 그 곳에 있어야 할 부모가, 친구들이, 친척 어른들이, 유년기가 기록된 장소들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지역이 도시화되고 어릴 적부터 높은 건물을 보고 핸드폰을 쥐고 살아온 이들이 어른이 되면서 고향 따위 명절에 나가는 해외여행보다 따분한 곳이 됐다.




  지나간 기억을 담아두지 않는다. 가끔 열어보고 닦아주면서 나를 찾아가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저 순간을 살아간다.


 우리는 모두 돌아갈 곳이 없다. 혹은 돌아갈 여유가 없다. 귀향에 대한 마음이 사치인 시절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귀향은 현재를 살아가는 것조차 버거움을 깨닫고 저 밑에 숨겨둔 마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깨에 올려둔 것들이 너무 무거워 애써 외면하고 사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친구가 이야기했다. 우리가 예전에 함께 뛰어놀던 학교의 모습은 변했고 학교 앞 단골떡볶이집에는 체인점이 들어섰다고.


 나를 못 견디게 하는 실체 없는 향수는 어찌 보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으며 그 어느 것에도 비할 수 없는 보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음 둘 수 있는 곳이 고향이지’ 라는 말이 위안이 됐으면 좋겠다, 친구가 전화 끝에 쓸쓸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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