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윤리적인 자판 노동자의 일일
복귀 후 두 달 조금 못 미치는 기간 동안에는 새로운 업무에 파묻혀 지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는 게 퍽 지루했고, 재미가 없었고, 권태롭고,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했는데, 그냥 내가 아주 사치스럽게 굴었던 것이었다. 나는 사람이 선 채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술을 아주 많이 마시고 기분 좋게 집에 들어왔을 때까지는 그랬다. 갑자기 휴대폰에 불이 나기 시작했고, 머리끝까지 마신 술이 확 깨는 기분이 들었다. 다음날 정신없이 기사를 '쏟아내고' 집에 들어온 뒤, 침대에 누워 맥이 풀린 채 이런 생각을 했다. 집에 돌아와서 누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고.
조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업계가 세월호 참사를 비롯한 각종 사회적 재난을 두루 겪으면서 언론 윤리라는 것에 대해 힘겹게 배워 나가는 듯하다는 점이다. 많은 회사가 빈소에 기자들을 투입하기를 그만두기 시작했고, 방송사들은 참혹하던 참사 현장을 담은 영상을 반복적으로 송출하기를 그만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회사는 그 모든 것들에 별로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조회수를 빨아먹기 위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재생산되는 영양가 없고 혐오스럽기까지 한 말잔치들을 바이라인을 달고 내보내도록 하고, 조간신문에서 제기한 문제들을 주물러다가 기사 비슷한 무언가로 만들기를 주문한다. 어린 기자들은 아직도 빈소에서 유가족들을 붙들고 '이야기가 되는' 사연을 뽑아내라는 주문에 부응하며 자괴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저런 것들에 일일이 화를 내고 있기는 하지만, 화는 내 안에서만 휘몰아치다 마음을 잔뜩 상처 입히고 흩어진다. 기자협회 재난보도 준칙을 미친 척하고 편집국장에게 던져 버리는 상상은 그저 상상으로만 끝난다. 끔찍한 사고 앞에서 그저 조회수와 돈벌이에만 눈이 벌게져 있는 편집국의 편집 방침(이라고 지칭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수준 낮고 근시안적인 지시들)에 제대로 된 문제제기조차 하지 못하면서, 결국 나 역시 비윤리적인 자판 노동자가 되어 간다. 하루아침에 날벼락처럼 친지를 잃은 사람들에게 나 같은 겁쟁이가 무슨 보탬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