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른다고 뭘 바로 뱉지 않아요
기자도 어쨌든 월급 받아서 먹고 사는 직장인이기 때문에, 속된 말로 '짜치는' 지시를 쳐내는 일도 업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조간신문을 훑어서 적당히 베끼는 것도 취재의 한 종류라고 믿는 편집국장이 쓰라고 시키는 기사를 쓰느라 정작 내 취재는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한 예다. 이미 다 나온 이야기를 적당히 버무릴 때도 어쨌든 최소한의 취재는 필요하고, 그때마다 느끼는 자괴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어쩔 때는 내가 자판기가 된 것만 같은 기분도 든다. 누르면 나오는 자판기. 월급 줬으니까 시키는 대로 기사나 뱉는 기사 자판기.
무척 공평하게도 편집국장이 자판기 취급하는 것이 기자뿐만은 아니다. 가끔은 "이렇다고 하는데, 전문가한테 전화 돌려서 기사 하나 만들어 봐라"라는 지시를 내리며 어떤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기 위해 평생 노력해 왔을 전문가들도 똑같이 자판기 취급을 한다. 기자가 전화를 했으면 당연히 '멘트'를 줄줄 뱉어야 한다고 믿는 모양인데, 그 사람들도 바쁘다. 연구도 해야 하고 학회도 나가야 하고 회의도 해야 하고 강의도 해야 한다. 큰 사건에 대한 분석이나 조언을 구하는 전화를 하는 기자가 나뿐일 리도 없다. 편집국장의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근거 없는 의문을 대독한 질문에 답해 달라고 하면서 시간을 빼앗기 미안할 정도로 바쁜 사람들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떻게 해야만 편집국장의 니즈를 맞추면서도 최대한 멍청해 보이지 않을 수 있을지 온갖 고민을 한 뒤 내키지 않는 손가락으로 통화 버튼을 누른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하는 일에 환멸을 느끼던 참에, 술을 왕창 마시고 들어온 남자친구가 전화로 횡설수설하며 했던 말 덕분에 오밤중에 별안간 눈물을 짰다. 민망해서 다 옮겨 적지는 못하겠지만, 대충 기자가 얼마나 세상에 필요한 직업이며 그 일을 하는 나는 얼마나 멋져 보이는가에 대한 길고 긴 이야기였다. 얼마 전에도, 몇 달 전에도 "나 기자 하기 싫어"라는 말을 토해내듯이 했는데 저 말이 또 내 발목을 잡는다. 자판기 취급을 받더라도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은 꼭 해야겠다. 어쨌든 나 혼자서라도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자판기가 아니라는 것을, 역사가 있고 감정이 있는 우주라는 것을 매 순간 되새기면서 살아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