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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Oct 19. 2021

워딩

그냥 받아쓰기가 아니고요

워딩 [명사]
취재 대상의 말을 기사에 인용할 수 있도록 받아 적는 것.


    우리끼리는 '티타임'이라고 불렀던,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서울중앙지검 비공개 정례 브리핑이 아직 살아 있을 무렵, 나는 뇌가 짜부라진 기분을 느끼며 멍하니 노트북을 껴안고 소회의실을 나왔다. 법조팀에 배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방대한 규모로 진행되는 수사 현안을 다는 파악하지 못했다. 차장검사의 입에서 사고 속도보다도 빠르게 나오는 것 같은 말들의 홍수에 휩쓸리며, 내가 서초동에서 가장 멍청한 사람이 아닐지 존재론적인 고민이 시작됐다. 다른 건 몰라도 워딩 실력만큼은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산산이 조각났다. 그날의 워딩은 입사 이래로 가장 엉망이었던 것 같다.


    처음 재판 취재를 들어갔을 때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재판은 취재만을 위해 마련된 자리가 절대 아니기 때문에, 그 공간에 나를 맞춰야 한다. 숨소리조차 조심해서 내야 할 것 같은 그 적막한 공간에서, 법대 중앙의 재판장석에 앉은 판사는 거의 소근거림에 가까운 크기의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치는 자판 소리가 재판에 방해가 된다고 느껴질 지경이었다. 평소 분당 700~800타 정도는 너끈히 나온다는 게 자랑이었지만 그만큼의 타속을 내지 못하고 쩔쩔매야만 했다. 그 와중에 각종 법률 용어는 얼마나 어렵게 느껴지는지, 거의 얼버무리듯 워딩을 마치고 재판정을 나선 뒤에는 거의 울고 싶어졌다.


    남이 하는 말을 받아 적기만 하면 되는데 뭐가 그렇게 어렵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워딩은 단순한 '받아쓰기'가 아니다. 발화 전체를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남들도 알아볼 수 있을 만한 문장으로 옮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단어 한두 개쯤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또 주어나 목적어가 생략되더라도 발화를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워딩의 제1목적은 누군가의 말을 기사 작성에 활용할 수 있도록 내용에 틀림이 없게 문서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대충 내용을 이해했다고 해서 듬성듬성하게 워딩을 해서는 안 된다. 출입처 현안과 업계에서 통용되는 용어를 빠삭하게 꿰고 있지 않으면 '들리는 대로 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법조 신참 기자에게는 워딩을 망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다 내 잘못이었다는 뜻이다.


어느 기자회견의 워딩 중 일부. 단지 받아 치는 행위만을 워딩이라 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몇 년간의 기자 생활을 토대 삼아 나는 나름대로 워딩을 잘하는 요령을 익히게 되었다. 먼저 뇌를 비운다. 잡념이 섞이면 남의 말이 잘 안 들린다. 그리고 들리는 대로 친다. 특히 숫자를 틀리지 않도록 유의한다. 필요 없는 조사와 어미 등은 과감히 제외한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속도보다 말이 이어지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문장을 완벽하게 치려고 하면 받아 적어야 할 내용을 놓치기 일쑤다. 머릿속은 깨끗하게 비운 와중에도 어떤 내용이 중요한지를 재빨리 잡아내서 '*'이나 '▲' 표시 등으로 강조한다. 이게 없으면 나중에 워딩을 보고 복기하며 기사를 쓸 때 요점을 빠르게 잡지 못해서 조금 곤란해진다. 워딩 사이사이에 발화자의 표정이나 제스처 등을 간간이 곁들이면 기사 내용을 더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


    가끔 급할 때는 녹음 앱을 켜 놓고 휴대폰으로도 워딩을 한다. 사방이 붐벼서 노트북을 펴고 바닥에 앉았다가는 깔려 죽기 딱 좋을 때처럼, 노트북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한다. 다만 비가 오면 액정이 손가락을 인식하지 못해서 휴대폰으로도 워딩을 하기 어렵다. 그럴 때는 빠르게 판단을 내려 과감하게 노트북에만 우산을 씌우고, 가방과 옷과 신발을 모두 포기하고 빗물 속에 주저앉아야 한다. 기사를 쓰려면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워딩은 기자로서 취재 분야의 전문성을 발휘하는 고도의 기술이자, 말의 홍수 속에서 가장 중요한 현안을 순간적으로 잡아채는 능력의 시험대이자, 임기응변의 장이기도 한 것이다. "그냥 받아쓰기 아냐?"라고 하면 조금 섭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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