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친구는 입으로 논문을 쓴다. 결론을 말하기 위해 각종 전제와, 필요하다면 논증 과정까지 촘촘히 깔아 놓는다. 유튜브에서 그레고리안 성가를 듣다가 삘 받아 빌려 온 <장미의 이름> 초반부에, 윌리엄 수도사가 수도원장의 말이 탈출했다는 추리를 하면서 꼭 그 친구처럼 이야기를 했었다. 한 번은 친구가 족발집에서 족발을 시켜 놓고 입으로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서론의 반도 듣지 못하고 "아, 그래서 야마……가 아니라 결론이 뭔데!"라고 성질을 냈다. 꼭 이렇게 (나처럼)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쓸데없이 기자인 티를 낸다.
직업병 하나쯤 없는 사람은 없을 테다. 입으로 논문을 안 쓰면 팔다리에 두드러기가 나는 내 친구처럼, 나는 야마를 안 잡으면 죽는 병에 걸렸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지만, 나는 대체로 발화가 두괄식으로 전개되지 않으면 짜증이 난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쓰는 글이 스트레이트 기사라서 그런가 보다. 스트레이트 기사는 기자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내용부터 '역 피라미드형'으로 제시하는 기사 형식이다. 야마를 품고 있으며 기사 전체의 주제와 방향성을 제시하는 가장 첫 단락을 '리드(lead)'라고 한다. 가치 판단 없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취재 내용에 가치를 부여하고 중요한 순서대로 정리하는 것이 기사 쓰기의 기본이다. 수습기자 시절에 배웠다.
'총 맞다'와 마찬가지로 '야마'의 어원도 잘 모르겠다. 전국 어디서든 보이는 산처럼 기사가 가리키는 바가 잘 보여야 해서 야마(山)일까. 내 생각에는 잡을 때 야마가 돌아서 야마인 것 같다. 이 일을 한 지 햇수로 10년에 가까운데, 기껏 괜찮은 아이템을 찾아서 취재를 다 해 놔도 야마 잡고 리드 쓰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
어차피 사람 생각하는 게 거기서 거기라 기사 아이템 자체는 다르지 않다. 얼마나 야마를 잘 잡는지에 따라 기사의 퀄리티와 주목도가 달라진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쌈박한 야마를 고민하다 보면 흰머리가 실시간으로 늘어나는 기분이다. 부장한테는 야마 이상하게 잡고 리드를 개떡같이 쓴다고 "한 얘기 또 하게 하면 고문관이라고 했지?"라는 말을 허구한 날 들으면서 신나게 털린다.(부장, 제가 존경하는 거 아시죠?) 그래 놓고 남의 말에 야마가 없다고 성질이나 내고 있다.
'야마'를 '(기사의) 핵심' 정도로 바꿔 써도 의미가 그렇게 틀리지는 않으나, 모든 은어가 그렇듯 일상어로 바꾸면 그 맛깔나는 뉘앙스가 영 살아나질 않는다. '핵심'이나 '주제'를 넘어 기자의 가치관과 판단에 이르기까지 더 넓은 범위를 끌어안는 듯한 느낌 때문이다. 불쌍한 기자들은 생활 속에서도 이런 말을 범용성 있게 쓰며 일상까지도 일에 쩌들어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고는 한다. 중구난방 아무말대잔치를 누군가 한 마디로 정리했을 때 "야마 잘 잡네"라고 한다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