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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Oct 21. 2021

단독

뽕 맞은 것처럼

단독 [명사]
'단독 기사' 혹은 '단독 보도'의 준말. 기자가 특정 사안을 가장 먼저 파악해 기사화한 것.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인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쪽에서 만사에 시큰둥한 내 낌새를 알아차리고 그만하자는 말을 했고 내가 거기에 쐐기를 박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많이 좋아했던 사람에 대한 마음이 이렇게 식을 수 있다는 게 속상했다. 한밤중에 마지막 통화를 하면서는 숫제 드라마를 찍고 자빠져 있었다. 고마웠다든가, 좋은 사람 만나라든가, 같이 보낸 시간이 참 행복했다든가, 당사자한테만 심각하고 남이 들으면 손발을 열 번쯤 접었다 펼 만한 말들을 횡설수설 울면서 했던 것 같다. (아,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네가 만날 수 있는 남자 중에는 내가 가장 괜찮은 사람일 것'이라는 말은 별로 안 고맙다. 그냥…… 차라리 저주를 해라.)


    다음날까지도 여운이 이어졌다. 오전 8시에 기자실에 출근해서 30분에 한 번씩 주룩주룩 눈물을 쏟으며 아침 일과를 억지로 해 나갔다. 바로 뒤에 사수가 앉아 있었는데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계속 줄줄 울었다. 청승맞기 이를 데 없다며 혼자 한심해하던 찰나, 부장이 [단독]을 붙여 내보낸 내 기사를 다른 회사에서 확인해 추종 보도하기 시작했다. 심심할 때마다 한 번씩 물을 먹여서 '이 길은 내 길이 아닌 것 같다'고 고민하게 만든 모 유력 언론사의 기자도 내 기사를 받았다. 그 회사에서 기사를 받기 시작하면 타사들도 받게 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갑자기 눈물이 쏙 들어갔다. 대신 히죽거리는 웃음이 입가에 고이기 시작했다. 매일 익사하는 사람처럼 물만 먹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물을 먹인다는 게 이렇게 짜릿할 줄은 몰랐다. 모종의 부위에 털이 나지는 않을지 걱정스러울 정도로 급격한 태세 전환이었다. 내 기사의 추종 보도는 방송사 메인 뉴스에도 나왔다. 이별의 아픔이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싹 지워졌다. '단독 뽕'은 정말이지 무시무시했다. 기자 친구들은 사노비 기질이 어디 가지 않는다며 놀려댔다.


    '특종'이라는 말은 잘 쓸 일이 없다. 박근혜·최서원 게이트처럼 나라 전체를 뒤흔들어서 크게 바꿔 놓을 만한 보도가 아니라면 특종이라고 부르기 남사스럽다. 또 특종은 보도한 언론사와 기자뿐만 아니라 반쯤은 바깥에서 만들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보도를 놓고 특종이라고 자찬하지도 않는다. 드라마에 나온 기자들이 특종 타령을 하면 우리끼리 신나게 비웃는 이유가 있다. 대신 우리나 독자 모두에게 익숙한 것은 '단독'이다. 아무도 몰랐던 사실을 특정 언론사가 가장 먼저 파악해 내보낸 기사를 단독 기사 혹은 단독 보도, 줄여서 단독이라고 한다.


    단독은 특종의 씨앗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잘 쓴 단독 기사로 상을 타기도 하지만, 보통 단독은 기자 사회에서 기자가 출입처를 얼마나 잘 파악해 장악하고 있는지 판단하는 지표로 쓰인다. 출입처 현안을 꿰뚫고 있다면 들어오는 정보의 양도 많고 그 속도도 빠르기 때문에 다른 기자들보다 먼저 단독 기사를 쓸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커진다. 특히 타사에서 받아서 쓸만한 단독을 많이 쓴 기자일수록 일 잘한다는 평가를 듣는다.


    호봉제를 실시하지 않는 언론사에서 단독 기사의 개수는 조회수와 더불어 내부 인사평가, 그러니까 연봉 책정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일견 공정한 평가 기준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인풋과 아웃풋이 늘 같지는 않으므로 단독에 대한 압박은 늘 모호하면서도 묵직하기만 하다. 공들여 쓴 기사에 돌아오는 반응이 영 맹숭맹숭한 반면, 얼떨결에 휘리릭 쓴 기사는 반응이 폭발하기도 하고, 아주 작은 실마리를 잡아서 열심히 취재하며 단독 보도를 노렸지만 영 소득이 없어 무위로 돌아가기도 하고, 불과 몇 분 차이로 타사에서 먼저 같은 내용의 단독을 내보내기도 한다. 기자가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람이라면, 또는 데스크의 기준이 높다면, 기사에 [단독]을 쉽게 붙이기를 주저한다. 일이라는 게 다 그렇다고, 내 마음 같이 되는 건 없다고 애써 마음을 달래 봐도 영 입맛이 쓰기만 하다.


    또 단독 보도를 타사에서 추종하지 않으면 상당히 민망해진다. 기사 가치 판단을 잘못했거나, 단독이라 할 만한 '깜'이 아님을 알면서도 단지 주목도를 높이기 위해 기사 제목에 [단독]을 붙인 경우다. 그런 단독을 우리끼리는 자조와 비꼼을 담아서 '나만 알고 싶은 단독'이나 '독단'이라고 부른다. 그런 '독단'도 결국 나와 내가 속한 매체의 영향력과 실력을 확인하고 싶은 욕심에서 나온다.


    동료 기자 C는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해 새빨개진 얼굴을 해서는 "언제까지 자잘한 단독 치겠답시고 이렇게 매일 아등바등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토로했었다. 내 마음도 그것과 다르지 않다. 운이 좋아 단독을 한 번 치고 나면 뽕을 맞은 것처럼 불타올라 일에 매진하지만, 약발이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는다. 모든 단독에 커다란 사회적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닌 데다, 단독과 다음 단독 사이 천 리는 되는 것 같은 길을 걷다 보면 '나는 썩 유능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스스로를 의심하며 괴로워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그렇게 화르륵 불타 올랐다가 식기를 반복한 자리에는 허여멀건한 잿더미만 남는다. 우울증에 걸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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