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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Oct 22. 2021

바이라인

내가 기잔데

바이라인(byline) [명사]
보통 기사 맨 마지막에 달리는 기자의 이름과 이메일 주소.


    "유력 인사들이 내 전화 한 통이면 나와서 '기자님, 기자님' 하면서 굽실대는 게 좋아."


    직접 들은 말은 아니다. 기자가 아닌 친구가 아는 기자에게 들었다고 기막혀하며 전해 준 이야기로, 언젠가의 술자리에서 무척 으스대면서 저런 말을 했다고 한다. 표정 관리를 하기 힘들었다. 얼마간의 침묵 뒤에, 나는 헛웃음을 치며 이렇게 말했다. "야, 바이라인 떼고도 그 사람들이 자길 만나 주는지 보라고 해라."


    바이라인은 기사 제목 바로 아래, 혹은 기사 맨 뒤에 한 줄씩 붙는 기자의 이름과 이메일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영문 기사 끝에 'Reported by (기자 이름)'라는 문구가 붙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작업물(기사)에 작업자의 이름과 소속, 연락처(이메일 주소)가 동시에 붙어 있다 보니, 바이라인 한 줄이 가지는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처음 현장에 나가기 전에 선배들은 이렇게 신신당부했다. "너희가 우리 회사의 대표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쫄지 말고 당당한 자세로 모든 취재에 임하라'는 것이 가르침의 핵심이었지만, 동시에 수많은 바이라인 각각이 회사의 얼굴이기도 함을 잊지 말고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당부이기도 했다.


    다만 요즘은 나만한 딸이 있을 것 같은 취재원들이 나를 꼬박꼬박 '기자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선배들의 가르침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곤 한다. 우리가 회사의 대표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취재원들이 만나는 사람이 자연인 ○○○이 아니라 특정 언론사에 속한 기자 ○○○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사람이 하는 일인 만큼 시간이 쌓이면 기자 개개인에 대한 인간적인 정도 두터워지기 마련이지만, 그가 언론사에 속해 있지 않다면 굳이 그를 상대해 줄 필요가 없다. (출입처를 떠난 뒤에도 인간 대 인간으로 교류할 수 있는 취재원이 소중한 이유이기도 하다.)


    어떤 조직을 굉장히 아프게 하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그 조직의 구성원이 큰 잘못을 했다는 사실은 명명백백했다. 기사를 올리기 전 마지막으로 반론권을 주기 위해 취재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대한 성의 있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은 취재원은, 수십 분 뒤 다시 내게 전화를 걸어 기사를 내지 않으면 안 되겠냐고 거의 읍소하다시피 했다. 그가 송화구 너머에서 연신 허리를 굽히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와는 별개로, 착각은 하지 말아야 했다. 그와 그의 조직은 보현이라는 개인이 아닌 내가 속해 있는 언론사라는 조직의 영향력을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어떤 기자들은 모든 것을 재직하는 회사의 이름값 없이, 정확히는 기자라는 직업의 후광 없이 홀로 오롯이 이루었다고 크게 착각을 한다. 출입처의 위상이 자신의 지위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여기기도 한다. 국회에 오래 출입하면 국회의원이 된 것처럼, 검찰에 오래 출입하면 검사가 된 것처럼 구는 기자들이 종종 보인다는 것은 크게 놀랍지는 않다. 그렇다고 흉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내가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도 상대방이 싫은 티를 내지 않고 받는 것, 어떤 자료와 설명을 요구해도 일단 요구를 받은 쪽에서 응대 정도는 해 주는 것, 거리낌 없이 상대방에게 점심 약속을 잡자고 할 수 있는 것, 모두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단지 기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대다수의 기자들이 사기업에 재직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회가 기자에게 '무엇인가를 널리 알리는 일'이라는 공적인 임무와 공신력을 부여했기에 취재원들은 기자의 취재에 협조를 해 준다. 이걸 잊으면 소위 말하는 "내가 기잔데 감히?"라며 '갑질하는 기레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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