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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Oct 22. 2021

기렉시트

근방에 '참 기자'가 너무 많사오니

기렉시트 [명사]
기자를 낮춰 이르는 '기레기'와 영단어 '엑시트(exit)'에서 파생한 말로, 기자 일을 그만두고 직업을 바꾸는 행위.


    '참 기자'가 너무 많다. 정확히는 레거시 미디어에 속해 있는 대부분이 모두 거짓 기자이고, 자신만이 참된 기자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진짜 저널리스트를 자임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거짓 기자로 지목될 때마다 조금 발끈했다가도, 그간 나와 우리 회사가 저질러 온 온갖 실태를 떠올리며 고개를 떨어뜨리곤 한다. 그러다가도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나랑 우리 편 빼고는 다 나쁜 놈'이라는 저 끝없는 확신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어떻게 자신의 판단만이 지극히 올바르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기자는 '쓰는 사람'이다. 기사를 쓰든 스크립트를 쓰든 앵커 멘트를 쓰든, 어쨌든 쓰는 사람이다. 그전에 기자는 의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묻지 않겠지만, 만일 누가 내게 기자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이 뭐냐고 묻는다면 끊임없는 호기심이라고 답하겠다. 어쨌든 취재를 잘해야 기사를 쓸 수 있고, 취재는 궁금증에서 출발한다.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한 궁금증, 의심스러운 것에 대한 궁금증. 슬프게도 내게는 조금 부족한 능력이다. 수습기자 시절부터 지금까지 1진으로부터, 데스크로부터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안 궁금해?"이다.


    일단 의심을 해야만 세상 일의 여러 단면을 다각도에서 조명할 수 있다. 그래서 기자들이 여러 부서에서 순환근무를 하나 보다. 나만 해도 사회부에 있었을 때에는 윤리적으로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대강 생각하고 넘어갔던 일을 산업부에서 달리 보게 된 경험이 있다. 반대로 산업부에만 있던 기자가 사회부에 간다면,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생리에 의해 가려져 있던 또 다른 삶의 조각들을 주워 들게 될 계기가 분명히 생길 것이다. 그렇게 서로 다른 모양의 퍼즐이 하나 둘 맞아 들어가면서 새로운 그림이 모습을 드러낼 때, 앎의 지평이 한층 더 넓어질 때, 이 일을 하기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 한 순간을 위해 기업공시와 관보와 인사청문보고서와 등기부등본과 과거 학위논문과 저작물과 옛날 기사와 공소장과 판결문 따위를 눈 빠지게 들여다보는 사람들. 먼지투성이 바닥에서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나를 환영하지 않을 것이 분명한 사람을 붙잡고 질문을 퍼붓는 사람들. 손목이 아플 때까지 자판을 두드리는 사람들. 궤도를 조금씩 돌리기 위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노력을 기울이며 하루하루를 살아 나가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지금은 잘 쓰지도 않는 '특종'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이쑤시개 하나 들고 실체도 모호한 거악에 덤비는 상상 속의 정의로운 기자들이 아니라, 나와 내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감히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하지는 않겠다. 너무 낯간지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 소수의 힘으로 손바닥 뒤집듯 딱딱 바뀌는 것도 아니고, 기자 혼자 그 모든 것을 다 하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로부터 "이상한 게 있는데요?"라는 말을 들으면 같이 뒤져서 같이 양지에 꺼내다 말린 다음, 탁탁 털어서 너는 게 우리가 하는 일이다.


    어쨌든 이 일을 좋아한다. 사람인만큼 여러 가지 오류를 아예 범하지 않거나 하긴 어렵겠어도, 확증편향이나 자기 확신이나 독선 같은 것들을 상당 부분 덜어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기자가 아니었다면 보지 못했을 것들이 많다. 아직도 너무 많다. 회의를 느끼며 기자 사회를 하나 둘 떠나는 동료들을 차마 붙잡지 못하면서도, 그들이 느꼈을 것과 같은 종류의 환멸을 느낄 때면 "나도 기렉시트 할 거야!"라는 말을 하면서도, 나는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해 줄 수 있는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직도 이곳에 남아서 뉴스를 만든다.


    누구나 떠들어대는 '참 기자'나 미디어에서 그리는 '특종 기자' 같은 게 못 되더라도,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게 기자질을 해 먹고 싶다. 소박한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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