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숙 생활을 접고 안디잔에 월세 아파트를 얻어 독립해 나왔다. 막상 혼자 살아보니 날아갈 것처럼 자유로웠다. 누구 눈치 볼 필요 없이 내가 원하는 때 원하는 만큼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몰랐다.
두 달간 배고파, 배고파가 머릿속에 각인되다 보니 어느새 음식에 집착하는 버릇이 생겼다. 칼질도 제대로 할 줄 모르던 요리 문외한이 매일같이 시장에 들렀다. 감자, 당근, 오이, 소고기, 체리, 등야, 수박, 무화과 등등 닥치는 대로 사다 날랐다. 조그마한 냉장고가 터져 나가고 있었다. 우즈베크엔 다양한 유제품이 많았는데 마침 빵공장도 집 앞에 있겠다, 툭하면 버터나 치즈, 요거트를 종류별로 사다가 쟁여 놓고 먹어댔다. 필요한 게 없어도 습관적으로 시장엘 들렀다. 오늘은 또 뭐가 나와있나 시장을 한 바퀴 휘돌고 나야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는 게 너무 신기하고 좋아서 요리를 하는 것도 설거지를 하는 것도 힘든 줄을 몰랐다.
한동안 안디잔의 크고 작은 시장이란 시장은 죄다 들쑤시고 돌아다니다 보니 눈에 띄는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다. 내가 살던 아파트단지 입구에 조그마한 시장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서 좌판을 놓고 장사를 하던 분이었다. 키가 150센티미터도 될까 말까 한 야리야리한 체구에 선한 웃음이 인상적이었다. 히잡을 쓴 모습이 얼핏 머릿수건을 두르고 일하는 우리네 시골 아주머니처럼 보여 친근함이 느껴졌다.
아주머니 좌판에 놓인 물건들을 구경하고 있으면 재미가 쏠쏠했다. 해바라기씨, 막대사탕, 눈깔사탕, 껌, 불량 과자, 손톱깎이, 비누, 라이터, 담배, 바람개비, 장난감 총칼 등등 오만가지 상품들이 하나씩 혹은 두 개씩 줄 맞추어 늘어져 있었다.
아주머니를 볼 때마다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 측은한 마음도 들었다. 하루 종일 좌판 앞에 쭈그려 앉아 있는데, 저렇게 허접한 상품들을 팔아 입에 풀칠은 하겠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해바라기씨 한 봉지가 40원이었다. 담배 한 갑이 제 아무리 비싸 봤자 1200원쯤 하려나. 그마저도 까치 담배라고 주로 한 개비씩, 두 개비씩 낱개로 팔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주머니 좌판이 보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꼼꼼히 살펴봐도 내가 살 거라곤 사탕뿐이었다. 오갈 때마다 사탕이라도 한 줌씩 집어와야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렇게 한 번씩 두 번씩 안면을 트다 보니 자연스레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아졌다. 현지인 집에서 하숙을 할 때 어려운 점이 많았지만 그래도 현지 말이 빨리 늘었던 장점이 있었다. 막상 하숙집을 나오니 언어를 연습할 상대가 없어 아쉽던 참이었다.
집에 혼자 있기 심심하다 싶으면 집 밖으로 나가 마땅히 산책할 데도 없는 곳을 이리저리 쏘다녔다. 가로수도 없는 매연 그득한 도로를 따라 더 이상 갈 수 없다 싶을 만큼 가보기도 하고, 꼬불꼬불 움푹 파인 동네 골목을 이리저리 누비다 철장에 가로막히고 때론 길을 잃기도 했다. 그러다 지치면 집으로 기어들어가다 말고 슬그머니 아주머니 좌판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불량식품 과자를 한 봉지 까서 함께 주워 먹으며 아주머니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좌판 주인아주머니 이름은 오이든이었다. 아주머니는 늘 웃음 띤 얼굴로 나를 맞아주었고 나는 친근함을 담아 오이든 오파(opa: 언니 혹은 누나라는 뜻으로 일반적인 여성 존칭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오이든 오파네 좌판으로 출근한다
봄이 무르익자 시장에 파릇파릇한 시금치가 나왔다. 영락없이 한국에서 보던 그 시금치가 맞았다. 반가운 마음에 시금치 1킬로그램을 사 왔다. 우즈베크에선 뭐든 킬로그램 단위로 팔았다. 나는 평소에도 김밥을 무척 좋아했는데 마침 수도 타슈켄트에 들렀을 때 구해 뒀던 김밥용 김이 눈에 띄었다. 내친김에 슈퍼마켓으로 뛰어가 맛살과 소고기를 사 왔다. 직접 절인 무, 계란, 당근까지 재료를 있는 대로 준비한 뒤 김밥을 잔뜩 말았다. 다 싸놓고 보니 나 혼자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았다. 인심도 쓸 겸 김밥을 잘라 보기 좋게 담고서 근처 시장으로 나갔다. 한식당에서 김밥 한 줄을 먹으려면 육 천원은 줘야 했다. 이 맛있는걸 우즈베크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내심 열렬한 반응을 기대했다.
시장에서 난(화덕에서 구운 빵)을 파는 아주머니들, 채소장수 알리쉐르 그리고 좌판 사장님 오이든 오파까지 두루 돌아다니며 나는 인심 좋게 김밥을 나누어 주었다. 생전 처음 보는 게 틀림없는 김을 보고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제야 우즈베크 사람들이 검은색 음식을 싫어한다고 들었던 게 번뜩 떠올랐다. 이 김은 한국에서 온 참으로 귀한 것으로 요오드가 풍부한 바다의 영양덩어리 어쩌고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해 봤자 그래도 인기가 없었다. 이런 걸 먹어도 될까 모르겠네 꺼리는 눈치가 역력했다. 괜히 갖고 나왔다며 시무룩해지던 찰나, "맛있기만 하네!"라며 유일하게 김밥을 달게 먹어 준 이가 오이든 오파였다. 너무 고마웠다. 음식을 대접한 건 나인데 어쩐지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도 나의 몫이었다.
음식을 많이 하게 되는 날이면 나는 이를 싸들고 오이든 오파네 좌판으로 나갔다. 우리 집 냉장고는 터무니없이 작아서 이미 오래전부터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한식이 너무 먹고 싶었던 나는 잡채, 김치, 깍두기, 장조림 등등 떠오르는 즉시 요리에 도전했다. 나는 나눠 먹을 사람이 있어서 좋았고, 오파는 덕분에 접하기 어려운 한국음식을 먹는다며 좋아해 주었다. 하도 뻔질나게 드나들다 보니 좌판 옆에는 아예 내 자리까지 마련되었다.
마침 오파는 나와 같은 동네 아파트 주민이었다. 오파가 병원엘 가야 한다거나 집에 밥 먹으러 간다거나 할 때면 내가 대신 좌판을 봐주기도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담배를 사러 왔던 사람들이 웬 외국인이 좌판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걸 보고는 멈칫하곤 했다. 가격을 외운다고 외워도 자꾸 잊어버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나이 탓, 그럴 때마다 손님들은 각자 알아서 돈을 내고 거슬러 가곤 했다.
저녁나절에 오파와 같이 좌판에 앉아 있다 보면 동네 꼬마들이 퇴근하는 아빠 손을 잡고 시장에 오는 걸 볼 수 있었다.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지나칠 수 없듯 꼬마들은 좌판에 놓인 사탕이나 과자 앞에 집념을 보였다. 잉잉 떼를 쓰며 기어이 지 아빠를 좌판으로 데려오는 1등 호객꾼이었다. 그러면 오이든 오파는 "왔어"라며 단골 꼬마들에게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열심히 팔아도 뭐가 남나 싶은 하품 나는 장사인데 꼬마 손님들에게 눈깔사탕을 공짜로 쥐여주었다. 때론 해바라기씨를 한 움큼씩 집어 주거나 인심 크게 과자를 한 봉지씩 안겨줄 때도 있었다.
좌판에 앉아 있으면 온갖 주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저 러시아 아주머니는 퇴근길에 매일 한 갑씩 그것도 제일 비싼 담배를 사 가네, 이 처자들은 해바라기씨 까먹는 솜씨가 예술이구만, 저 오파는 앳되어 보이는데 벌써 애가 셋에 또 임신까지 힘들겠다. 간혹 좌판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나에게 굳이 말을 걸어오는 아재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오이든 오파가 크게 혼을 내서 쫓아버렸다. 옆에 든든한 보디가드도 있겠다, 좌판을 제2의 직장 삼아 놀이터 삼아 나는 세상 편하게 삐대고 앉아 있을 수 있었다. 해가 어둑어둑해지면 비로소 오파는 영업을 마쳤다. 팔다 남은 물품들을 시장 구석구석에 숨겨두고 자물쇠로 잠갔다. 고생하셨어요 푹 쉬세요, 응 내일 보자꾸나 오파와 인사를 나누고 나면 나도 퇴근이었다.
오파는 내 러시아어 선생님
오이든 오파와 붙어있을수록 러시아어가 일취월장했다. 오파는 구소련 시절에 무슨 공장에서 일했단다. 소련 시절의 우즈베크는 어땠을까 호기심이 일었다. “소련 시절엔 너나 나나 모두 일자리 걱정이 없었어. 먹을 것도 얼마나 싸고 풍부한지 배급표를 받으면 우리 다섯 식구가 넉넉히 먹고살았거든. 과일향은 또 얼마나 좋았게, 복숭아 한 개를 꺼내면 그 향기가 저어기서 여기까지 풍길 정도였단다. 그때가 참말로 좋았었지.” 과거를 회상하는 오이든 오파의 볼이 복숭아처럼 반질거렸다.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반짝거렸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나갔다. 오파는 그 시절을 무척이나 그리워하고 있었다.
어떤 시절이든 과연 좋기만 했겠는가. 예순이 넘도록 좌판을 떠나지 못하는 지금의 신세와 대비되어 그 시절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 게 아닐까 나는 짐작했다. 훗날 오파의 사연을 듣게 된 후에야 비로소 오파가 왜 그리도 과거를 그리워 했는지 알게 되었다.
독립 이후 우즈베크의 모든 가치는 돈으로 통일되어 버렸다. 학벌도, 교양도 뒷전이었고 그저 돈 잘 버는 사람이 최고였다. 여기 가도 돈, 저기 가도 돈, 돈돈돈. 오이든 오파는 쓸 데는 많은데 생각처럼 돈이 잘 벌리지 않는 신세를 간혹 한숨으로 표현하곤 했다.
안디잔은 수도 타슈켄트나, 관광지로 유명한 사마르칸트나 부하라 그리고 이웃 도시 페르가나와는 달리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우즈베크 민족 비율이 유독 높았기 때문이었다. 소련 시절에도 안디잔의 시골사람들은 모두 우즈베크어만 썼었단다. 안디잔에서 러시아어를 제대로 구사할 줄 아는 이들은 대개 러시아인, 고려인 그리고 소련 시절 외국이나 타슈켄트로 유학을 다녀온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오파는 다른 사람들과는 우즈베크어로 대화를 나눴지만 나와 있을 땐 일부러 러시아어를 썼다. 자신의 러시아어가 많이 녹슬었다고 겸손을 보였지만 실력이 상당했다. 발음도 좋았고 무엇보다 문법을 잘 알았다. 내가 문법적으로 틀린 성(性), 수(數), 격(格)을 쓰면 즉석에서 바로잡아 주곤 했다. 은근슬쩍 더 쉬운 우즈베크어로 말할라치면 "러시아어 연습해야지" 호랑이 선생님으로 변신했다. 우즈베크어로 말할 기회는 많았지만 러시아어로 말할 기회가 없던 나를 위한 배려였다.
오이든 오파의 바람 잘 날 없는 가지들
시장 주변에 위치한 휴대폰 가게나 PC방은 껄렁껄렁한 청년 무리들의 서식지였다. 고온 건조한 기후에 맨 피부가 그대로 노출되어서인지 우즈베크 사람들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열 살 어린 경우가 많았다. 사십 대 후반인가 싶었는데 여권을 보면 나보다 한참 동생이라 서로 깜짝 놀라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오이든 오파네 좌판에 출근한 이날도 근처에 시시껄렁한 이십 대 청년 무리들이 보였다.
일전에 휴대폰 가게에서 이런 무리들과 사소하게 시비가 붙은 적이 있었다. 핸드폰이 잘 안 돼서 수리가 되는지 물어보던 참이었다. 생각보다 수리비가 비싸다고 했더니 자기들끼리 내 등 뒤에다 농담을 던지고 키득키득 대는 게 아닌가. 알아듣지 못할 말로 나를 흉내 내며 놀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단박에 기분이 나빠진 나는 "야 너네 지금 나 비웃냐? 비웃지 마라"하고 쏘아붙였다. 돌아서는 나를 향해 또 뭐라 뭐라 대길래 한껏 성질을 내고는 가게를 나와 버렸다. 사실 현지인과의 마찰은 되도록 피해야 하는데 그놈의 욱하는 성미를 못 이기고 만 것이다. 시키지도 않은 성질을 부려놓고는 괜히 해코지를 당할까 봐 집으로 오는 내내 얼마나 후달렸는지 몰랐다.
껄렁껄렁한 이십 대 청년 무리 가운데 하나가 오이든 오파의 좌판으로 다가왔다. 오파는 아무 말 없이 주머니를 뒤적뒤적하더니 갑자기 그 청년에게 돈뭉치를 건네는 게 아닌가.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멀뚱하게 앉아만 있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자릿세 강탈 뭐 그런 건가 싶었다.
"얘가 같이 살고 있는 내 외손자 자수르야, 이제 17살이야."
거칠어 보이던 청년이 갑자기 순한 양으로 변신해설랑 나에게 수줍게 인사를 건넸다. 예상과 달리 자수르는 아직 십 대에 불과했으며 오이든 오파의 맏딸의 외동아들이었다. 학교는 안 다니고 저렇게 노상 친구들이랑 어울려 다녀 걱정이라고 했다.
오이든 오파에게는 딸만 둘 있었는데 첫째 딸은 돈을 벌러 러시아에 가 있었다. 원래는 사위와 함께 러시아로 떠났다는데 사위가 바람나서 집을 나가더니 그 뒤로는 소식이 깜깜했다. 문제는 지금 첫째 딸이 중병에 걸린 상태란 거였다. 신장을 비롯해 몸 여기저기가 안 좋아 일도 못 하고 월세방에 누워 지내고 있었다. 고향인 안디잔으로 오고 싶어 하지만 이주할 돈이 없었다. 오파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외손자의 생일이 곧 다가오는데, 18살이 되면 러시아에 있는 지 엄마한테 보낼까 싶다고 했다.
오파의 둘째 딸은 시집을 가 안디잔 시골에 살고 있었는데 형편이 좋지 않았다. 농사를 짓는데 수입이 형편없었다. 좌판에서 한 푼 두 푼 모아 되려 작은 딸 살림에 보태주고 있는 판이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다더니, 오이든 오파는 자식, 손주 뒷바라지 때문에 일흔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여기선 사람이 죽으면 하얀 천으로 시체를 여러 겹 감싸거든. 그 무명천을 사려고 돈을 차곡차곡 모아 왔는데 오늘 장만을 했네." 수의를 마련한 뒤라 그런가, 그 날따라 오파가 울적해 보였다.
잔잔히 불어오던 바람을 맞으며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앉아 있다가 문득 오파가 물어 왔다. "네가 80년생이라 했던가?" '다(da)'그렇다고 답을 하니, 오파는 나직한 목소리로 아들 이야기를 꺼내 놓기 시작했다.
실은 오파에게도 아들이 하나 있었다. 살아 있다면 나와 같은 나이였다. 세상을 떠난지는 벌써 십 년이 넘었다. 오파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이내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요 앞에 새로 생긴 큰 슈퍼마켓 있지? 예전에 거기에 조그만 가게들이 여럿 있었어. 아들이 길에서 다른 무리 애들과 시비가 붙었나 보더라고. 그중에 하나가 앙심을 품고 아들을 며칠 따라다녔대. 그리곤 그 가게에서 나오는 아들을 칼로 찔렀대나 봐. 키도 크고 인물도 좋고 참 착한 아들이었는데... 담장 높은 건물, 그 교도소 알지? 그래 거기. 얼마 전에 그 죽인 아이 면회를 다녀 왔었어. 나를 보고 죄송하다며 울더구나. 그 아이도 참... 새파랗게 젊은 시절을 감옥에서 보내고 있으니..." 오이든 오파는 덤덤히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더 슬퍼 보였다.
"얘야, 요즘 이렇게 생각을 하면 죽는다는 게 참 무서워. 죽으면 알라 앞에 서게 될 텐데... 살아생전 믿음이 부족하고 나쁜 일을 했으면 검은 돌이 쌓이고 믿음이 깊고 착한 일을 했으면 흰 돌이 쌓이는데, 나한텐 검은 돌이 많아서 지옥으로 가게 되면 어쩌나... 요즘 그것만 생각하면 눈을 감고 잠이 드는 게 겁이 나." 오이든 오파의 고백은 또 긴 한숨으로 이어졌다.
그 날따라 손님이 뜸했다. 뜨거운 여름 한낮에도 그늘 아래 좌판에는 바람이 설설 불어오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턱을 괸 채 나는 먼 곳을 응시했다. 입을 열었다가는 그렁그렁 차 오른 눈물이 떨어질까봐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담담한 오파앞에 내가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입술을 깨물었다.
우즈베크 사람들의 생활은 종교와 떼레야 뗄 수가 없다. 밥을 먹어도 버스를 타도 손님을 맞이해도 기쁜 일이 생겨도 슬픈 일이 생겨도 늘 신을 부르고 신에게 기도했다. 그들에게서 종교의 신성함을 보기도 했지만 때론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어 복종케하는 그들의 신을 목격하기도 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며 생각했다. 신이란 게 있다면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자신의 창조물을 향해 넘치는 사랑을 보여주는 게 마땅하지, 어떻게 그들을 영원한 고통에 빠뜨릴 수 있단 말인가?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는 대신 피도 눈물도 없이 응징하는 신이라니, 용서하고 품어줄 수 없는 그런 1차원적인 신이라면 나에겐 필요 없겠다. 하루하루 고달파도 인간의 존엄을 지켜가는 오이든 오파 같은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신이라면 더더욱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국수와 함께 한 이별
하루는 오이든 오파가 국수를 만들어줄 테니 집에 놀러 오라고 나를 불렀다. 나는 주소를 적은 쪽지를 들고 오파의 집을 찾아갔다. 시장에서 바로 지척이었다. 오파는 아파트 문을 열어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은 아담했다. 5층이라 수압이 낮아 물이 잘 안 나오는 걸 빼면 살기가 괜찮다고 했다. 물은 아래층에서 떠다 먹는 대신 집에 가스는 잘 나와서 한 겨울에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단다. 오파는 고깃덩어리가 큼지막하게 붙은 소 뼈를 솥에다 통째로 넣고 육수를 바글바글 우려내고 있었다. 마침 유리병으로 국수 반죽을 정성스레 밀고 있던 참이었다. 곧 국수가 한 그릇 뚝딱 만들어졌다. 특유의 향신료만 빼면 흡사 우리 할매가 집에서 홍두깨를 밀어 만들어 주던 안동 칼국시를 먹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제 러시아로 갈 비행기표를 샀어. 가서 딸도 만나고 돈벌이도 여기보단 낫지 않겠나 싶네." 18살이 된 외손자는 이미 두 어달 전에 지 엄마를 찾아 러시아로 떠난 참이었다. 비행기표는 키르기스스탄 오쉬발이 싸더라며 출발일은 다음 토요일이라고 했다.
좌판은 어떻게 했냐니까 벌써 맡아 놓을 사람을 구해뒀단다. 정들자 이별이라고 나는 수시로 출근하던 좌판 직장과 러시아어를 가르쳐 주던 선생님과 그리고 매일 수다를 떨던 친구를 모두 잃게 된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해졌다. 오이든 오파는 나이도 많고 지병도 있는데 러시아에 가서 또 얼마나 고생을 하시려나, 모스크바는 겨울에 몹시 춥다던데 어떻게 지내려나 걱정부터 들었다.
오파는 일을 하다가 딸의 건강이 괜찮아지면 함께 안디잔으로 올 계획이라며 섭섭한 마음이 든 나를 눈치채고 위로했다. 겨울은 가스가 팡팡 나오는 내 집에서 보내야 하지 않겠냐며 천진한 웃음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낯선 세상에 대한 염려보다는 설렘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오파는 우즈베크 전통문양인 목화송이가 그려진 파란 그릇 하나를 나에게 주었다. 지난번에 사발 그릇이 없어 불편하다고 했더니 그 말을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는 오파가 돌아오면 그릇을 다시 돌려주마 약속을 하고 집을 나왔다.
마침 근무하던 고등학교의 시험기간이 닥쳐서 시험문제 내랴, 채점하랴 정신없이 바쁜 일주일을 보냈다. 며칠 뒤 오이든 오파네 좌판으로 출근을 해 보니 오파가 더없이 반겨주었다. 오늘따라 좌판이 휑해 보였다. 장사를 접는다고 물건을 채워 넣지 않아서였다. 내일부턴 새로운 사람이 맡아 장사를 한다고 했다. 일요일이면 오파를 따라 도매시장에도 같이 가곤 했었는데 이젠 그럴 일도 없어졌다.
해가 어스름해지자 퇴근 준비를 서둘렀다. 오파는 나에게 가지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마음껏 가져가라고 했다. 나는 물끄러미 좌판을 살펴보다가 바람개비 하나를 집어 들었다. 오파는 팔다 남은 물건을 여기저기 나누어 주었다. 다행히 값이 제일 나가는 담배는 새로운 사람이 인수해 주기로 했단다. 그렇게 오파와 마지막 퇴근을 서둘렀다.
토요일 아침 일찍, 약속한 시간에 맞춰 시장 앞으로 나갔다. 오파는 커다란 짐꾸러미를 들고 벌써 나와 있었다. 둘째 딸과 외손녀도 배웅을 나와 있었다. 함께 다마스를 타고 시내 택시 승강장으로 향했다.
키르기스스탄 오쉬로 가는 택시는 4명의 승객이 다 차야 출발할 수 있었다. 오파가 승강장에 도착하자마자 마침 한 자리가 비어 있는 택시가 있었다. 이야기를 나눌 새도 없이 서둘러 짐을 옮겨 싣고 작별을 해야 했다. 오파와 볼을 맞대는 우즈베크식 인사를 나누었다. 기대와 설렘이 가득한 얼굴로 떠나는 오파를 보니 내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택시를 타고 떠나려는 오파의 손을 잡았다. 타지에서 생활하자면 예상치 못한 일들이 많을 것이다. 긴급할 때 쓰라고 비상금을 넣은 봉투를 오파 손에 쥐여 주었다. 그게 오파와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젊은 아주머니가 새로 맡은 좌판엔 이전보다 물건들이 다양해졌다. 심지어 사탕이나 껌마저 더 싱싱해 보였다. 그래도 왠지 사려고 발걸음을 멈추지는 않게 되었다. 한동안 시장에서 채소를 파는 알리쉐르를 통해 오파 소식을 간간이 들을 수 있었다. 외손자가 종종 전화를 걸어오는 모양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 소식마저 끊어져 버렸다.
나 역시 새로운 러시아어 과외 선생님을 찾았고 학교 일로 바쁘게 지내다 보니 오파를 점점 잊어가게 되었다. 그래도 시장 옆 좌판을 지나칠 때면 문득문득 오이든 오파가 궁금해지고는 했다.
해가 바뀌고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11월 말이 되면 2년을 보낸 안디잔에서의 내 임기도 끝이었다. 나를 대체할 후임도 이미 한국에서 파견 와 있었다. 내가 살던 집과 살림을 후임에게 그대로 물려주었다. 대신 오이든 오파가 빌려 준 그릇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해 두었다. 이러이러한 분이 빌려준 거니 혹시 나중에라도 보게 되면 그릇을 돌려드렸으면 한다는 당부도 전했다. 한 동안 나 역시 잊어버렸 듯, 그 후임도 곧 그릇에 대해 잊어버리지 않았을까 싶다.
오랜만에 오이든 오파를 차근차근 회상하고 있자니 오파가 만들어 주던 따끈한 국수가 생각난다. 오이든 오파에겐 다른 선물을 남겨두고 목화 그릇은 한국으로 가져올 걸 그랬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오파는 큰 딸과 함께 무사히 안디잔으로 돌아왔을까, 어디 있든 아파도 조금만 아프기를 바란다. 그리고 오파의 가지 많은 나무가 이제는 고요하길 조용하길 바람이 잘 나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