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이게 나의 운명일까 저게 나의 운명일까? 운명을 염두에 두면 필연적으로 매사 의미부여가 많아진다. 어떤 사람을 만나도, 어느 곳을 방문해도 '내가 생각해왔던 일들과 어떤 긴밀한 연관이 있는 걸까?'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자칫 나의 경솔한 선택이 원치 않는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을까 덜컥 겁도 난다. 생각에 생각이 거듭되다 곧 밀려든 생각의 쓰나미 속에서 허우적대는 게 수순처럼 이어진다. 선택에 따른 결과를 이리저리 시뮬레이션하다 보면 머리에 쥐가 나고 마음과 몸이 위축된다. 이럴 때 의지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군가는 무당이나 역학자를 찾기도 한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신의 미래와 운명에 대해 진지하게 물어보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충동에 휩싸인 적이 여러번이었다. 나보다 현명하고 밝은 사람을 찾아 붙잡고 묻고 싶었다. 그들이 나에게 정답을 알려 주지 않을까, 왠지 그들은 알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럴 때면 나는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 외부 요인에 계속 마음을 쓰며 끄달렸다. 자꾸만 시선이, 주의가 밖으로 밖으로 향했다. 나는 그 느낌이 참 싫었다.
길 위에서는 매 순간순간이 선택의 연속이다. 어느 것 하나 그냥 주어지는 날이 없었고, 어느 것 하나 익숙한 것이 없었다. 익숙해진다 싶은 순간이란 떠날 때라는 소리와 다름 없었다. 그래서 마음이 안정되지 못했다. 내가 하는 선택이 옳은 것일까, 내가 가는 길이 맞는 것일까 망설임은 수없이 되풀이되었다. 짙은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한 발 내딛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낯선 땅, 낯선 사람들 사이에 그대로 주저앉아 망부석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말이야, 운명이라는 건 이야기가 다 끝났을 때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지금 내가 하는 선택은 하나의 점에 불과할 뿐이다. 다음으로 어떻게 이어질지는 나도 모르고 점쟁이도 모른다. 이야기가 다 끝난 후에야 비로소 과거의 내 선택들이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선을 그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점들이 이렇게 저렇게 이어지는 걸 지켜보다가 '와 이게 이렇게 연결될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고, 비로소 그 때에야 내가 했던 선택에 운명이라는 이름표를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운명이란 게 진짜 존재할 수도 있다. 아무리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듯이, 나의 좁고도 미천한 경험과 세상 속에서 짐작조차 못하던 일들이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을 수도 있다. 설령 그렇다손 치더라도 나는 운명을 염두에 두며 여행하고 싶지 않다. 여태껏 너무 무거웠다. 실패할까 봐 잘하지 못할까 봐 그리고 이게 내 운명이 아닐까 봐 생각도 발걸음도 너무 무겁고 버거웠다.
대신 이제는 담담해지고 싶다. 뭐가 운명일까를 고민하고 운명이라서 어떻게든 될 거라고 자위하는 대신, 거침없이 선택하고 싶다. 가슴이 시키는 대로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의외로 선택은 쉬운 일이다. 설령 나에게 어떤 일이 닥친다 해도 그걸 책임지고 풀어나갈 강단과 배짱을 기르고 장착하면 될 것이다. 시행착오 비용을 기꺼이 지불할 자세로 말이다.
나는 운명 운운하는 이들 보란 듯 이렇게 속삭이고 싶다. 글쎄 이 여행이 끝날 때쯤엔 나도 당당하게 외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말이다, "운명아! 너는 다른 사람 알아봐. 나는 괜찮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