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빛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만난 현자

by 김커선

당당하게 서거라

바삭한 햇살 아래 올리브가 영글어 가는 계절, 튀니지의 도시 스팍스에 도착했다. 지중해 남쪽 해안에 자리한 오랜 항구 도시이자, 수도 튀니스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고대 유적과 현대 산업이 공존하고, 바다와 사막의 기운이 뒤섞여 낯선 이방인조차 품어줄 듯 묘한 따뜻함이 있었다.


그날 나를 맞은 사람은 아이다 아주머니였다.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여행자를 반기며 시원한 아이스크림 가게로 이끌었다. 그녀는 튀니스에서 만난 소아과의사 소피아 아주머니의 친구의 친구였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라도 된 듯 금세 편안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아이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또렷하게 마음에 박혔다.


아이다는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이란성 쌍둥이, 의대생 딸과 공대생 아들을 둔 어머니기도 했다. 암 투병으로 낯빛에 병색이 스쳤지만, 말소리는 힘 있었고 눈빛은 형형했다. 무엇보다 마음을 붙잡은 건 딸을 향한 그녀의 교육 철학이었다.

“종교도, 전통도, 사람들의 시선도 네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어. 네 생각과 신념을 따르며 살아야 해.”


그녀는 딸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목소리를 따를 용기를 가르쳤다. 우즈베키스탄에서 2년간 살아본 나는, 그 말의 무게를 알았다. 이슬람 사회에서 그런 가르침은 드물고 때로는 급진적이기에 더 놀라웠다.

딸은 엄마의 말을 깊이 새긴 듯, 공부도 열심이었지만 삶을 즐길 줄 알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알고 선택에 책임질 줄 아는 단단한 젊은이였다. 그런 딸을 키운 아이다는 이슬람 사회에서 흔치 않은 어머니이자 여성이었다.


아이는 식물과 같아

아이다의 어투는 단호했지만 따뜻함이 스며 있었다. 무엇을 물어도 답을 내려줄 듯 현명했고, 어떤 이야기도 품어줄 듯 성숙했다. 나는 그만큼 강한 인상을 남긴 여성을 처음 만났다. 존재감과 지적 내면이 어우러진 사람. 그 순간, 여성으로서의 롤모델을 발견했다. 그곳은 민주주의나 여성 인권운동으로 유명한 유럽 도시가 아니었다. 지중해 바람이 스치고 햇살이 골목의 하얀 벽을 물들이는, 이슬람 변방의 작은 항구 도시였다.

“하루는 한 남자아이의 표정이 너무 안 좋은 거야. 무슨 일 있냐고 물으니, 아이가 요즘 삶이 너무 우울하다는 거야. 아빠는 돈 버는 일에만 골몰해 버려진 기분이래. 그래서 말했어. ‘네가 품고 있는 마음이 어떤지 아빠가 너에게 뭘 해줬으면 하는지 편지를 써서, 아빠가 보게 두렴.’”

그녀의 눈빛에는 아이를 감쌀 온기가 스며 있었다.

“얼마 후 다시 만났을 때 아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어. ‘선생님 덕분에 제 삶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편지를 본 순간부터 아빠가 변했다는 거야."

나는 물었다.

"부모는 아이가 뭘 원하는지 정말 몰랐던 거예요?"

아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많은 부모들은 돈으로 해 줄 수 있는 게 전부라고 생각해. 하지만 아이들은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거든.“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고, 다시 말을 이었다.

"아이는 식물과 같아. 주면 줄수록 더 많은 걸 수확할 수 있을 거야. 성정이 아무리 거칠고 지각없는 사람이라도 식물을 때리지는 않잖아? 식물을 다루듯 아이들을 대해야 해. 존중해야 해.“


현자가 아닌 이를 위한 여행

아이의 표정을 읽어내고, 무슨 일이냐 묻고, 해법까지 건네는 선생님. 이런 어른이라니 멋지지 않은가? 나도 언젠가 그런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아이스크림의 단맛보다 그녀 말의 여운에 오래 머물렀다.


세상에는 타고나길 현명한 사람들이 있다. 생각이 곧바르고, 말은 물처럼 흐르며, 태도가 온화하면서도 단호하다. 자연스레 고개가 숙여지는 존재들. 운이 좋게도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분과 함께 살았다. 바로 내 친할머니였다.


“선아, 부대(부디) 남한테 바래지 마래이. 남한테 바래는 마음이 있으먼 사람이 쪼그라들어 못 쓴다.”

예안댁 우리 할매의 당부였다. 할매는 젊어 과부가 되었어도 누구 앞에서든 기품있고 꼿꼿했다. 도리에 맞지 않으면 호통했고, 대단한 설득력으로 할 말은 자분자분 이어가셨다. 키까지 우뚝 컸던 할매는 내가 기억하는 순간부터 늘 큰 어른이었다. 너그럽고 자애로웠으며 언제나 길을 짚어주는 현자셨다. 쪼그라들지 않고 스스로 서는 힘, 그 당당함이 할매의 가르침이었다.


나는 천성이 현명하지 못해 여행을 한다. 부딪치고 깨지고, 만나고 배우고, 생각하고 깨닫고, 짧은 시간에 압축된 삶을 살다 보면 후천으로라도 현명함을 약간은 얻을 수 있을까?


나는 또 하나의 현자 앞에 앉아 아이스크림이 녹는 줄도 모르고 그녀의 말과 눈빛에 빨려들었다. 현명함은 산사의 고요에서만 솟는 게 아니었다. 길모퉁이 지중해빛 시원한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도 조용히 흘러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지혜는 먼 길 끝에 있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할매의 온기로 내 곁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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