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엄마에게 아기를 맡기지 않기로 했다

엄마에겐 자신의 삶도 중요하니까

by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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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엄마도 엄마의 삶을 살아."


초등학교 6학년 때쯤, 수건을 개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린 눈에도 일을 하면서 우리 가족의 밥을 챙기는 엄마의 일상이 버거워 보였던 걸까. 흰머리 하나 없는, 기억 속 젊은 엄마가 나를 옅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던 것도 같다. "그래. 고마워. 우리 딸이 최고네."


하지만 수건을 갠 뒤 일을 나가고, 아빠의 식사를 챙기는 엄마의 일상은 당신의 머리가 희끗희끗해져 염색으로 가리고, 내가 결혼해 독립한 후에도 이어졌다. 세월로만 치면 20년이 넘었다. 이젠 친정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내게 가끔 반찬을 해다 주고, 가까이 사는 오빠네 가족에 자잘한 음식 같은 것을 챙기면서 아빠의 병간호를 하고 일을 나간다. 내가 아이를 낳은 후에는 일이 하나 더 늘었다. 아이를 돌보는 일이다. 시간 자체가 없어 자주 는 아니더라도, 시간을 쪼개 1시간 거리의 내 집으로 와서 아이를 봐주신 뒤 홀연히 또 떠난다.


'엄마의 삶을 살라'라고 할 땐 언제고, 이렇게 가끔씩이라도 시간을 내서 아이를 봐주는 엄마가 고맙기도 하지만 종종 서운한 생각도 들곤 했다. 회피하듯 맡긴 적은 거의 없다. 지금 같은 비상사태에 어린이집의 긴급보육조차 맡기기 어렵다든지, 불가피하게 나와 남편 모두 야근을 한다든지 할 때 주로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엄마의 도움을 받은 적은 손에 꼽았다. 매주 일요일마다 가는 종교활동을 좀 덜 나가면서 나를 도울 순 없는걸까. 그래도 일요일은 매주 돌아오잖아.


엄마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워킹맘인 회사 선배와 아이 맡기는 문제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을 때였다. 선배는 복직 후에 엄마에게 아이를 맡길 생각이었는데, 엄마가 자신의 친구에게 보내려다 잘못 보낸 카톡을 받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선배의 엄마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고민을 친구에게 허물없이 털어놓고 있었다. "나이 들어 이제 내 삶도 소중한데, 딸아이가 자신의 아이를 내게 맡기려고 합니다. 이 아이를 제가 보는 게 맞는 걸까요?"


엄마의 돌봄이 당연하다고, 자식 입장에서는 생각할 수 있겠지만 선배와 나는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가 더 이상 돌봄이 필요한 아이가 아니라는 점과, 엄마도 당신 자신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자신이 낳은 아이가 스스로 먹고 입고 잘 수 있으며, 심지어 경제활동까지 할 수 있는 나이가 됐다면 양육의 역할은 그로써 끝날 수도 있다는 점을. 이 사실을 잊은 채 다른 여건을 고려하기보다 나를 도울 사람으로 먼저 엄마를 떠올린 것이다.


내가 엄마가 되니 더욱 느낀다. 몹시 사랑스러운 아이가 행복한 모습을 보면 나도 행복하지만, 아이의 행복과 나의 행복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내가 고민이 많고 몸이 안 좋을 때에는 아이를 위해 몸으로 놀아준다거나 계속 눈을 마추지면서 좋아하는 놀이를 반복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의 영역이다. 아이와의 복작복작한 하루가 끝나고 아이를 재운 뒤, 술을 마시며 좋아하는 영화를 보거나 글을 쓰며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이 올 때야 비로소 행복을 느낀다.


물론 이 감정에는 아이가 오늘 하루도 건강하게 먹고 자고 논 후에, 아이의 하루를 무사히 마치게 했다는 엄마로서의 효능감도 포함된다. 분명한 건 나는 엄마이기 이전에 취향과 호불호를 가지고 있는 온전한 한 개인이었다는 점이다. 아이가 내 삶의 우선순위는 맞지만, 그렇다고 지금까지 유지해온 개인의 정체성을 아이와 일대일로 맞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엄마도 비슷하지 않을까.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이제 양육의 의무가 끝난 중년의 엄마는,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 시간조차 자식이라는 이유로 엄마의 에너지와 시간을 당연하게 빼앗는 일은 어쩌면 부당하다. 유럽 등 해외보다 자식의 삶에 부모가 더욱 많이 관여하는 문화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더 이상 서운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철없지만 엄마 삶의 무게를 순수한 눈으로 직시할 수 있었던, 초등학교 때의 그 시선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래야 나의 아이가 시간이 흘러 독립한 후 시간과 에너지를 드는 일을 나에게 요구할 때에도, 그 요구를 거절하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물론 그때가 되면 딸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 하나로 그저 내 시간을 내어줄 가능성이 크지만, 그럼에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과도한 요구를 하는 일이 당연하지만은 않다는 점을, 지금 이 순간은 알아두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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