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상처가 가족 갈등 통해 폭발하는 과정 다룬 ‘부부의 세계’
[드라마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당신, 정말 정상 아닌 거 알아?”
지난 토요일 종영한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주인공 ‘지선우(김희애 분)’가 주변 인물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일지도 모르겠다. 이혼하기 전 배우자의 내연녀였던 ‘여다경(한소희 분)’도, 그의 직장 동료인 ‘설명숙(채국희 분)’도, 그의 전 배우자인 ‘이태오(박해준 분)’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그에게 했으니 말이다. 실제로 배우자에 대한 의심이 확신이 되고, 그에게 자신이 받은 상처를 되갚아주는 과정에서 그는 미행, 폭행 유발 등 비이성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주인공이 이렇게까지 주변 인물에게 ‘비정상’ 취급받는 드라마가 흔하진 않을 텐데, 내 주변에서도 그의 행동이 상식적이지 않다고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물론 나도 그랬다. 그냥 깔끔하게 증거 확보해서 법원에서 끝내면 될 일을 뭘 저렇게 구질구질하게 구나. 내가 당사자가 아니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드라마 전 회에 걸쳐 드러난 그의 과거에는, 그가 그토록 배우자에게 집착했던 이유를 짐작할 만한 단서가 있다. 어린 시절 그의 부모가 치정으로 얽혀 동시에 목숨을 잃게 되면서다. 자존심이 셌던 그는 주변의 동정과 수군거림을 딛고 일어나 보란 듯이 성공해야 했고, 악착같이 공부해 인정받는 의사가 됐다. 여기에 자상한 남편과 천진난만한 아들은 그의 성공 가도를 탄탄하게 만들어주는 울타리였을 것이다. 견고했다고 느꼈던 울타리가 배우자의 외도로 단박에 흔들렸으니 배우자를 향한 증오는 상상 그 이상이었을 테다.
문제는 지선우 자신이 과거의 상처를 그대로 덮어둔 채, 사회적 인정이나 가족 형성 등 겉으로 보이는 안정적인 울타리만 추구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충격을 받은 인간이 상처를 딛고 일어서려면 부정, 분노, 타협, 우울증, 수용 등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고 했다. 모든 부정적인 감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여야 상처까지 자신의 일부로 흡수한 채 회복될 수 있는 밑바탕이 마련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직장에서의 인정은 충분히 자신의 노력으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가족 구성원간의 신뢰나 애착 형성은 상처와 같은 개인의 내밀한 감정이 관여하는 영역이다. 배우자와 자식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은밀하게 종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외도가 자신과 아들에게 입힌 피해와는 별개로, “부부 사이의 일에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다”던 그의 독백이 이런 자신의 깨달음을 뒷받침해주는 듯하다.
지선우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건 자신의 삶이, 스스로 어쩔 수 없는 힘에 의해 좌우되고 무력하게 절망하게 되는 상황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어린 시절 그가 경험한 부모의 죽음은 자신의 잘잘못과 무관한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최소한 자신에게는, 배우자의 외도가 상대방에게 헌신했던 자신에게 주는 벌과도 같았다. 그런 상황이 그 자신의 삶을 견딜 수 없는 불확실성과 불안함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그는 아들을 잃은 후에야 깨닫는다. 불확실하고 불안한 삶은 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불가능한 영역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그리고 이 불안을 결점으로 받아들인 채 메우려고 하기보다, 삶의 한 일부로 받아들인 채 잘 다독이며 동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드라마 마지막 회의 말미에 아들이 자신을 찾은 장면은,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틴 자신에게 주는 보상의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상처를 인지하고, 잘잘못의 단계 이전에 그런 맥락에 있었음을 인지한 후에도 그의 아픔은 지속될지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상처를 결점으로 인식한 채 끊임없이 매꾸려는 노력은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주변 인물이 그에게 자꾸 ‘비정상’이라고 했던 건, 어서 자신의 상처를 직시하고 자신을 다독이라는 메시지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선우가 이태오를 확실하게 응징하길 바랐으나, 드라마는 결국 그런 권선징악의 결말을 보여주진 않았다. 그보단 옳다고 믿었던 자신의 기준이 무너진 후 밑바닥에 있던 상처를 직시하고, 그 곳에서 다시 삶을 쌓아 올려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누군가는 비정상이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그는 ‘갈 지(之)’ 자로 걸으면서 스스로와 화해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