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하지 말고, 일단 몸을 맡겨볼 것
어제 남편과 저녁 먹고 뒹굴거리다 우연히 내 인생곡선 얘기를 하게 됐다. 가장 좋았던 때가 언제냐고 남편이 물어보길래, 곰곰이 생각하다 스물두 살 때라고 했다. 현실을 딱히 알 필요도 없는 대학생 때였던 데다 학보사에서 지도 학번이었고, 그만큼 내가 속한 공간을 내가 주도적으로 꾸려 나간다는 효능감이 있었던 시절이다. 나의 꽉 막힌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고, 여대생치곤 드물게 C 학점 메우느라 바빴던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아마 목적이 확실한 공동체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었다는 점이, 나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했던 것 같다. 학보사 퇴임 후에는 그 공동체를 직업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기자를 지망했다. 길어지는 언론고시에 지쳐갈 때쯤, 여러 인턴을 통해 직업의 본질 중 하나인 '밥벌이'를 위한 수익 추구 행위와 가치를 추구하는 일이 반드시 일치할 필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결론이 자의에 따른 생각인지, 타의인지 모호해 일단은 맘 놓고 조금만 놀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페스티벌도 다니고 공연도 보면서 시간을 보냈던 게 불과 지난해의 일이다.
꼭 일터가 아니어도, 목적이 확실한 공동체에 몸 담을 기회가 없진 않았다. 학창 시절의 일요일은 교회에서 보냈고, 학보사를 다니며 같은 뜻을 품었던 친구들도 가까운 거리에서 지향을 실천하며 살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망설이는 걸 보면, 그저 어딘가에 완전히 소속되고 싶지 않아 하는 나의 성향이 내 삶의 성취를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닐까. 이게 내 성향이라면 나는 언제 또 돌이켰을 때 좋았노라고 회고할 시절이 생기려나.
고민이 깊어지던 차에 다시 해는 저물었다. 이 밤이 다시 돌아온다고 삶의 성취가 쉽게 이뤄지진 않을 텐데, 이렇게 현실에 떠밀리듯 흘러가는 대로 살아도 괜찮을까. 지나온 오랜 시간 동안 있었던 일을 깨달은 후에는 항상 다짐한다. 일단은 주어질 현실에 부딪혀보자고. 이 현실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여기에 완전히 묶인 나를 발견하는 일이 '지금, 여기'를 잘 살아내는 가장 좋은 방식일 수 있다고. 시간이 지나 다시 인생곡선을 그릴 때, 지금의 이 시기가 가장 혼란스러우면서도 좋았던 시절이라고 떠올릴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