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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모를 산 꼭대기에 눈이 살고 있었다. 굽이지는 깊은 골짜기와 끝도 없이 가파른 절벽 위에 그는 홀로 살고 있었다. 외롭지 않았다, 어차피 혼자였으니까. 슬프지 않았다, 기쁜 적도 없으니까. 아픈 적도 없었다,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법을 몰랐으니까.
그녀는 눈 아래 사는 사람이었다. 깊은 골짜기와 가파른 절벽은 없었지만 그녀는 홀로 살고 있었다. 다들 소중한 사람과 함께 살고 있는데, 왜 나는 혼자일까.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이 그녀 안에서 소용돌이 쳤다. 그녀는 외롭고, 슬프고, 아팠다.
그녀는 종종 산을 올라가곤 했다.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소리가 났다. 조금 더, 조금 더 올라갈수록 헉, 헉, 거친 숨소리가 터져나왔다. 머리에 울리는 세찬 심장과 달뜬 숨 소리는 마치 제 것이 아닌 양, 낯설기 그지 없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숨을 고르면 모든 이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럴 때는 외롭지 않았다. 슬프지 않았고, 아프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매일 조금 더, 조금 더 올라가기 시작했다.
눈은 자신 앞에 선 낯선 이를 발견했다. 누군가 이 곳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말간 눈빛, 붉게 달아오른 볼과 작은 숨소리, 바르르 떨리는 작고 곧은 손가락. 강한 호기심에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휘잉, 몰아치는 돌풍 소리에 그 존재가 지워졌다. 깜짝 놀란 눈은 자신의 몸을 흗뜨려 다시 작은 숨소리를 찾았다. 앞에 있었다. 누구지.
그녀는 눈물이 터져나왔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이제 더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데 어떡하지. 이제 나는 외로워서 어떡하지. 엉엉 눈물이 나왔다. 그때 그녀 앞에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강한 추위에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웅크렸다. 곧 하늘에 별가루가 뿌려진 듯 반짝반짝 작은 바람이 일어났다.그녀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 말했다. 아름답다. 그래, 오길 잘했어. 내려가자. 그리고 다시 또 오자.
아름답다, 아름답다, 잘했어, 아름답다, 아름답다, 잘했어. 눈은 여러번 아름다운 단어들을 불었다. 후, 후, 작은 바람이 일어나 소복히 쌓인 눈 위에 새겨졌다. 아름답다. 눈은 묻고 또 묻고 다시 묻었다. 그리고 묻고 또 묻고 다시 물었다. 아름답다, 아름답다고 해줬어.
그녀는 열심히 그곳을 찾았다. 세상의 끝에 그녀는 홀로 있었다. 아름다운 별가루는 여전히 그녀 앞에 있었다. 호흡을 고르고, 세차게 뛰는 심장을 한껏 느끼고, 일어섰다. 괜찮아.
눈은 자신의 소리를 죽이는 법을 배웠다. 꾹꾹 누르고 뭉칠수록 눈의 세계에는 그녀의 작은 숨소리가, 바스락거리는 발자국이 깊게 남았다. 어느새 눈은 소리만으로도 그녀의 존재를 찾아낼 수 있었다. 눈은 그녀의 소리를 좀더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게, 와구와구 다른 소리들을 먹었다, 바람을 먹기도 했다. 태양을 먹고, 고요를 먹었다. 그렇게 계속 먹고, 또 먹고, 먹었다. 결국 그곳엔 오직 그녀의 소리만이 남았다.
소리가 그녀의 마음에 새겨지던 날, 그녀는 떠났다. 세상의 끝에서 혼자였기에 그 어느 곳에서도 살아갈 수 있었다. 춥고 춥고 사무치게 추운 그곳에서도 그녀는 홀로 살아가지만 홀로 살아남지 않는 법을 깨우쳤다. 그것을 인식한 순간, 그녀는 다시 외롭고 슬프고 아팠다. 하지만, 괜찮았다.
눈은 하염없이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가 오지 않았다. 태양이 뜨고 어둠이 뜨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한 끝에 눈은 몸을 일으켜 산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세상은 너무 소란스러워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찾을 수 없었다. 들리지 않았다. 눈은 그녀의 소리를 찾기 위해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너도 너도 그것도 저것도 다 먹어야해. 그래야 들을 수 있어, 먹어치우자 그래야 만날 수 있어. 눈의 몸은 점점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감당이 안 될 만큼. 그리하여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가는 길마다 그녀의 소리가 뚝, 뚝, 사라져갔다. 온 세상이 고요했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눈은 홀로 살아가지만 더이상 홀로 살아갈 수 없었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외롭고 슬프고 아프다. 괜찮아.
눈은 말했다. 나도 외롭고 슬프고 아프다. 괜찮지 않아.
그렇게 그녀가 떠난 세상이 눈물에 잠겼다. 오직 그녀만이 세상 밖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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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하도 많이 오길래, 왜 이렇게 많이 오나 생각하다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쓰다보니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축약, 생략했지만..
직접 그린 그림을 첨부하고 싶었는데, 위 사진이 내가 그리고 싶었던 느낌인지라...ㅎㅎ
사진을 넣고 직접 그린 괴발개발 개발새발 그림은 여기 첨부)
부산에도 눈이 왔다고 합니다. 눈을 보는 것이 어렵다는 곳인데, 그곳에도 눈이 내렸다고 하니 정말 전국적으로 많이 왔다 싶어요. 눈이 오면 참 기쁘면서도, 깊은 밤 홀로 눈을 바라볼 때는 뭔가 쓸쓸한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해요. 눈 위에 드리운 가로등 불빛 때문일까, 그 위를 추적추적 걸어가는 낯선 사람의 등을 봐서 그런걸까. 그러다 다시 아침에 반짝반짝 햇살을 머금은 눈길을 보면 기분이 좋고. 특히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라면 더더욱! 특히 이번 눈은 스키장에 가야 볼 수 있을만큼 많이 내리고 쌓여서,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그녀의 감정도, 눈의 감정도 내게 있습니다. 나는 이 감정을 어떤 길로 이끌어야하나, 괜찮을까 괜찮지 않을까. 생각이 찾아올때면 스스로에게 묻곤 합니다. 괜찮아, 괜찮지 않아? 아직 대답이 없네요. 제 세상도 아직 눈에 잠겨있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