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의 연속성
글을 쓰고 싶다. 그런데 써지지 않았다. 매번 눈 앞에 반짝이는 커서를 보다가 컴퓨터를 끄곤 했다. 원인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스스로의 실력도 탓해보고, 사람에게 관심 없는 성격도 꼽아보고. 그러다 눈치챘다. 솔직한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말은 잘하는 편이었다. 타인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것은 아쉽지 않을 정도의 언변을 갖고 있다고 자부했다. 말의 높낮이, 사용해야하는 단어, 전달하는 호흡, 치고 빠져야하는 타이밍까지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채는 편이었다. 갖고 싶은 것을 부모님께 얻어야하는 욕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불특정 다수에게 사랑받고 싶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렸을 때의 나는 귀엽다고 말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너 같은 딸 낳아봐라' 하겠지만, 역시나 우리 엄마도 참 힘겨웠다고 했다.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관심받고 싶은 아이의 잔머리가 그 쪽으로 좀 더 발달했던 것이 아닐까. 사실 연극 배우 하면 잘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내심 할 때가 있다. 내 안에서 대본이 쌓여 가끔은 그걸 말하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으니까. 이건 본능적인 감에 가깝다. 그때 나는 대종상 대상이 남부럽지 않은 연기자가 된다.
그런데 글은 그렇지가 않았다. 이상하게 쓰면 쓸수록, 다듬으면 다듬을수록 진짜가 튀어나왔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한가득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것을 글로 옮기면 늘 막혔다. 누군가에게 말로 전달할 때는 입에 모터달린 것 마냥 나오더니,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쓰려고 하면 숨이 막히듯 턱턱 거렸다. 답답했다. 이럴 거면 말로 하는 직업을 하지, 왜 글을 쓰고 싶어한 걸까.
말은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꾸며낼 수 있는 포장지가 눈 앞에 널려있었다. 앞서 말한 것들을 휘감아 상대를 속일 수 있었다. 상대가 있기에 대본이 살아 숨쉴 수 있었다. 그가 내 말에 즐거워하는지, 관심을 갖는지, 다음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하는지, 내 말에 귀 기울이는지. 흡사 짧은 연극무대와 같았다.
하지만 글은 나를 속속들이 드러내야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래서 내 결론은 무엇인지. 고통스러운 자기 고백의 연속이었다. 상대의 반응은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에 맞춰 수정 또한 불가능했다. 한 번 토해낸 자기고백은 쉽게 바꿀 수 없었다. 그것이 결국 나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물론 글도 속일 수 있지 않냐고, 대상을 정해서 말할 수 있지 않냐고.
나도 그럴 수 있을 줄 알았지.
근데 나는 여전히 눈 앞의 상대에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에세이는 자기 고백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에세이를 읽는 것이 무척이나 불편했다. 다른 이의 생각을, 그 속내를 낱낱이 훔쳐보는 기분이었으니까. 물론 합법적으로 당사자 동의 하에 제공되는 이야기들이었지만. 이상하게 자꾸만 그것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생각과 통찰에 깊게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그만큼 불편했다. 나는 그렇게 솔직해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타인의 솔직함이 낯설었다. 이렇게까지 자신의 일상을, 생각을, 고통을 까발릴 수 있다니.
어쩌면 글을 쓰는 작가는 그 어떤 연예인보다 더 드러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로는 굉장한 자기애를 가진 (요즘 말로) 관심종자일 수도 있겠다. 그런 글을 쓰고 싶어하면서도, 그런 사람이 되려는 자신이 못내 견딜 수가 없다. 이 모순된 감정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아무도 나를 모른다는 가정하에 글을 쓴다면, 나는 어디까지 솔직해질 수 있을까. 세상을 향한 시선과 주변을 둘러싼 사람,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어디까지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 생각이 미쳤을 때 소름이 돋았다. 나는 생각보다 솔직한 삶을 살고 있지 않구나.
하나하나 까놓고 보면 많은 곳에 어둠이 묻혀있다. 내가 특히 더 불행해서는 아니다. 어떤 부분은 평균치, 어떤 부분은 특별히. 하지만 나 뿐만이 아니다. 삶을 살아가는 모두가 비슷하다. 하지만 사랑받고 싶어하는 어른아이는 반대로 그 누구에게도 상처주기 싫고 무엇에도 상처받고 싶지 않아한다. 사랑하지만, 때로는 원망스러워. 건강해보이겠지만 이 부분은 엄청 곪았어. 이렇게 말했지만 난 이런 생각을 해.
솔직하다는 것은, 나의 생각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꽤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덕분에 글을 쓰는 것이 고통스럽다. 그래서 글이 써지지가 않는다. 나에게 이런 글은 고해성사의 시간이 되버리니까. 그런데도 글이 쓰고 싶다. 무엇이든 쓰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 에세이도 써보고, 소설도 끄적여보고 무엇이 됐든 나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말이 아닌 글을 택한 이유는 결국 소리 없이 외치고 싶기 때문인걸까. 대나무 숲에서 나는 무엇을 묻어버리고 싶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