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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joge Feb 20. 2018

나의 사적인 명절 증후군 리포트

결을 맞추는 시간

  명절 연휴를 보내고 맞은 월요일. 주말 저녁부터 올라온 체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아 하루 휴가를 냈다. 빈 속으로 침대 위를 뒹굴거리다 인터넷 뉴스로 명절 증후군이 젊은 세대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내용의 기사를 읽었다. 기사에 따르면 노년층이 겪는 명절 증후군은 가족, 친지들로 북적인 명절을 보낸 다음 찾아오는 공허함으로 인한 우울증이다. 기자는 "잦은 안부 전화 등 자식들의 세심한 관심"을 강조하며 기사를 끝맺었다. (기사)

 

  그동안 명절 증후군은 젊은 세대의 전유물로 여겨지긴 했다. 집안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국 고유의 명절에 일가친척이 모이면 미취업 20대는 취업 압박에, 미혼 3040대는 결혼 압박에, 기혼 3040대 그 중에서도 여성은 가사 노동 압박에 시달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실 이번 명절 연휴 끝에 찾아온 내 체기도 과식에서 비롯된 물리적 현상만은 아닐거라고 내심 진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노년층까지 명절 증후군으로 괴로워한다니 도대체 누굴 위한 명절 연휴란 말인가. 여튼 우리 부모님은 아직 노년은 아니지만, 평소에 자식들이 전화 자주 안 한다며 서운해하시던 아빠 모습이 떠오르며 죄송스럽고 짠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 기자가 주문한대로 평소에 안부 전화 잘 하면 되는걸까? 뭔가 완벽한 해결책이 아닌 것 같다. 부모님의 명절 증후군을 '공허함'으로, 나의 명절 증후군을 '결혼에 대한 압박'으로 짧게 결론 짓는다면, 해결책도 '잦은 안부 전화' 나 '잔소리 덜하기' 정도의 상투적이되 절대 완벽하지 않은 것들밖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특히 아빠는 전화 안 한다고 서운해 하시면서 막상 전화하면 무뚝뚝하게 몇 마디 던지시곤 끝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그래서 나는 이번 설 연휴 동안 있었던 사건, 주고받은 말들, 그 속에서 내가 느낀 감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글로 '고백'하기로 했다. 깊이 생각하고 글로 말하면 진심이 조금 더 잘 전달될 수 있을거라고 믿기에.

 

1. 결을 맞추는 시간

  명절 하루 전 아침. 부모님의 말다툼이 있었다.

몇 마디 오고 가지 않았는데, 주고 받는 말의 속도, 말이 다툼으로 번지는 속도가 엄청 빨랐다. 이후 진행된 말다툼을 곰곰이 되짚어보면 '지금'의 다툼이 아니었다. 긴 세월동안 켜켜이 쌓인 서운한 감정들이 시간과 맥락을 광속으로 뚫고, 짧은 몇 마디 말 속에 담겨 툭툭 튀어 나온 것이었다. 요는, 아빠는 근래들어 엄마가 부쩍 짜증스럽게 말한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이게 무슨 짜증이냐며) 아빠가 너무 권위적이고, 그 동안은 엄마가 맞춰줬지만 이제는 싫다는 것이었다.


  스물다섯 동갑내기가 결혼해 나란히 이순(耳順)을 코앞에 두었는데, 아직도 이렇게 사소한 일로 싸우고 삐지는 게 부부생활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은 이건 서로의 '스타일'의 문제 아닌가, 오래 같이 살면 서로의 '스타일' 정도는 파악이 될 것 같은데 왜 지금까지 계속 이 문제로 싸우는 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던 와중에 연휴에 읽으려고 가져간 은유 산문집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에서 '결을 맞추는 시간'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다.


왠지 요즘 나의 속도가 못마땅하다. 책 읽는 속도, 밥 먹는 속도, 실망하는 속도, 커피 마시는 속도, 문자에 답하는 속도, 글을 쓰는 속도, 눈물나는 속도, 책을 사는 속도, 신경질 내는 속도, 그리움에 물드는 속도, 죄다 너무 빠르거나 느린 속도만 있다. (중략) 부끄럽지만 나는 내가 열심히 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에 허천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지 않으면 살아지지 않는 줄 알았다. 사는 게 서툴렀다. 내 마음이 얼마나 얼뜨고 거칠었나. 들볶았고 들볶였다. (중략) 결에 따라 섬세하게 살피고 헤아려서 어떤 일은 느린 가락으로 어떤 건 빠른 템포로 살아야 한다. (중략)   
은유 산문집, <싸울때마다 투명해진다>


허겁지겁 허천난 듯해서 사랑을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결을 맞추는 시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가서 '얻어오는' 마음이 필요하다. 다른 마음을 '얻어오는' 것이 필요하다.
문태준 시집 <가재미>  뒤표지 글(위 책 인용글)



  위 구절을 읽는데 바로 부모님 생각이 났다. 자식 다섯을 키우며 삶의 고됨에 순응하고 적응하고 이겨내느라, 정작 서로의 맘을 찬찬히 살피고, 이해하고, 서로 다른 결을 맞춰가는 연습은 많이 못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의 고됨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긴 말 없이도 서로를 위로하고 묵묵히 지켜준 세월이 아니었을까.


  엄마 아빠의 짧은 말다툼 후, 별다른 화해 이벤트 없이 다 같이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갔고, 오전의 말다툼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흔적 없이 사라졌다. 다 필요없고, 역시 '부부 싸움은 칼로 물베기'가 진리인 것인가. 말의 '칼'로 서로에게 낸 작은 상처 정도는, 함께 보낸 세월이 그랬듯, 시간 속에 '물'처럼 흘려보내주는 사이, 부부사이.


  그래도 누구나 겪어봐서 알듯이 작은 상처도 아프다. 지금까지보다는 조금 천천히 흐를, 둘만의 시간이 다시 많아질, 앞으로의 시간 속에서 아빠 엄마가 서로의 맘을 찬찬히 살피고, 이해하고, 서로 다른 결을 맞춰가면 좋겠다. 그 동안 서로 쌓은 내공이 있으니 반은 먹고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여전히 어려운 문제일 수도 있다. 삶의 속도가 너무 빠르면 내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마음을 세심하게 돌볼 여유가 없다. 오랜 시간 돌봄 받지 못한 채, 정리되지 않은 채 쌓여온 날 것의 감정들이 폭발이라도 한다면, 곳곳이 지뢰밭 일 수도 있다. 그래도 아빠는 만물에서 이야기를 듣는 시인이니까 엄마의 마음에도 이전보다 조금 더 세심하게 귀 기울여주시기를. 엄마는 다섯 아이를 웃음으로 키운 긍정의 여왕이니까 지금껏 그래왔듯 환한 웃음으로 아빠를 대해주시기를.


 결을 맞추는 시간은 사랑하는 둘 사이에서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각각이 ‘소우주’인 인간들이 다닥다닥 모여 하는 세상살이 그 자체가 결을 맞추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다른 결들과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평소 대화할 때, 서로 생각이 다를 가능성이 높을 때는 더더욱, 속도를 조금 줄여서, 천천히 말하고, 듣고, 생각하고, 다시 말하고, 들으면 명절이든 아니든, 크든 작든 싸울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가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에서 얘기한 것처럼 ‘일반적’으로 ‘좋다’ 혹은 ‘당연하다’라고 받아들여지는 가치에 대해 말할 때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명절 때 만난 미취업/미혼/기혼 조카에게 ‘취업은 했니?’ ‘결혼은 안하니?’ ‘아이는 아직?’ 등등의 질문을 섣불리 하면 안되는 이유다. 그 가치 영역 밖에 존재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질문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다. ‘넌 왜 이 영역에 들어오지 않니/못하니?’라는 무례한 참견, 혹은 압박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나누는 규범을 모조리 갖다 버려야 한다. 규범이란 반드시 그것에 의해 배제당하는 사람들을 산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작고 단편적인 인생에서 사소한 행복이란 그런 규범, 또는 ‘좋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에게는 사소하고 좋은 것을 모두 놓아버리는 일이 매우 어렵다.
기시 마사히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나는 이 색깔 돌이 좋아’라는 말은 거기에 아무도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색깔 돌을 갖고 있는 사람은 행복해’라는 말은 그 돌을 갖고 있는 사람과 갖고있지 않은 사람과의 구별을 낳는다. 한마디로 여기에는 행복한 사람과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좋은 것에 대한 모든 말을 ‘나는’ 이라는 주어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시 마사히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여튼 책 조금 읽고 부모님께 훈수(?)두는 것 같아 민망하니까 내 다짐도 이야기해보자면, 앞으로 나도 내 삶의 속도, 사랑의 속도, 대화의 속도에 좀 더 예민해지고자 한다. '결에 따라 섬세하게 살피고 헤아려서 어떤 일은 느린 가락으로 어떤 건 빠른 템포'로 리듬감있게, 나만의 리듬을 만들며 사는 것으로! 나는 나대로 즐겁고, 너는 너대로 즐겁구나 나는 이게 아픈데 너는 그게 아팠구나 하고 인정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2016년 인생 영화 <다가오는 것들>을 보고 적었던 짧은 소감인데 이 글을 쓰다보니 다시 생각났다. 나만의 리듬을 만들며 산다면, 긴 인생이 아름다운 음악처럼 될 수 있지 않을까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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