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이피랑가와 거대한 상파울루
우리나라의 국가는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하고 시작을 하고 브라질 국가는 ‘평온한 이피랑가 둑에 영웅들의 함성이 들린다’라고 시작을 한다.
브라질 국가가 이렇게 시작한 것은 평온한 이피랑가의 강둑에서 섭정자 동 페드로 1세가 포르투갈의 식민지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비로소 브라질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이피랑가 강둑은 상파울루에 있다.
이피랑가는 아주 작은 강이라서 아주 평온했고 사실 당시의 독립 선언 역시 아주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1500년 카브랄의 브라질 도착 이후 약 300년간 브라질은 그저 설탕의 공급지, 금의 공급지 등의 식민지의 역할이었다. 무언가 국가로서의 발전은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807년 포르투갈의 황제 동 주앙 6세와 포르투갈의 왕실은 나폴레옹 전쟁을 피해 브라질로 온 이후, 브라질은 아주 큰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다.
분명 식민지 브라질은 작은 포르투갈에 비교해서 너무나 큰 땅이고 또한 매력이 넘치는 곳이었다. 포르투갈의 황제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식민지 브라질에 대한 생각이 점점 바뀌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패퇴하고 포르투갈은 다시 나폴레옹에서 해방되었다. 당연히 포르투갈의 본국은 황제의 귀환을 촉구하였다. 동 주앙은 식민지 브라질에 남을 이유가 없었지만, 그는 계속해서 브라질에 남겠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브라질을 포르투갈과 알가르베 연합왕국으로 격상시키고 자신을 이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1820년 포르투갈은 계몽주의 영향을 받은 혁명이 발생했다. 혁명의 발생은 국왕과 정부 기관의 부재에 따른 위기, 정치, 경제, 군사의 위기, 또한 무역에서 브라질에 유리한 경제적인 위기 (당시 왕실은 브라질에 있었기 때문에) 등, 복합적인 이유였다. 또한, 당시 영국군이 포르투갈 군을 통수했는데 그에 따른 불공정의 불만도 혁명을 가속화했다.
이 혁명으로 현재의 국회 기능을 하는 임시 평의회가 만들어졌다. 또한, 비록 왕이 현재 포르투갈에 없지만, 국왕의 이름으로 통치를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국왕의 귀환을 요청하였다. 이들은 헌법을 기초할 의회를 소집하기로 했다. 그래서 재정 의회를 구성할 대의원 선거가 시행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브라질에 있고자 했던 국왕은 포르투갈로의 귀환을 결정했다. 왕위를 잃을지 모른다는 걱정에서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의 묘책을 생각했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아들 동 페드로 1세를 브라질의 섭정자로 남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묘책은 어쩌면 바보 같은 선택이 되고 말았다.
1821년 4월 동 주앙과 4,000명의 포르투갈인은 정부 기관을 이끌고 포르투갈로 귀환을 했다. (그가 처음 브라질에 도착했을 때는 왕실 관계자 15,000명과 함께 60,000명의 사람과 함께 브라질에 왔었다.)
동 주앙 6세가 브라질을 떠나 포르투갈을 향하자 모든 것이 아주 빠르게 이루어졌다. 브라질에서도 재정 의회를 구성할 대의원 선거가 벌어졌는데 선출된 의원은 모두 브라질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포르투갈에서는 이 새로운 의회가 개원되었는데 이는 브라질 대의원들이 도착하기도 전이였다. 그리고 많은 정책이 통과되었다.
이런 정책들은 브라질에 불리한 많은 정책 등이 있었다. 특히나 브라질의 지방정부 들은 과거 브라질의 수도 리우 데 자네이루에 예속되었는데 이제는 리오가 아닌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예속되었다.
포르투갈의 혁명 세력 등은 식민지 브라질에 대한 경멸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해서 브라질 대의원과 포르투갈 대의원들은 서로 대립이 폭발하기 일보 직전에 이르렀다.
마침내 새로운 의회는 브라질의 행정기관을 리스본으로 이전하고 브라질에 있는 섭정자 동 페드로마저 본국 귀환을 의결했다.
과거 자신의 아버지가 나폴레옹 전쟁에서 영국 편에 있겠는가 프랑스 편에 있겠는가의 어려운 딜레마는 그의 아들 동 페드로로 넘어갔다. 그의 딜레마는 포르투갈로 돌아가겠는가 아니면 브라질에 남겠는가 하는 선택이었다.
동 페드로는 9살에 브라질에 왔다. 그는 브라질의 공기 아래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브라질의 자유와 자연을 사랑했고 그로서는 포르투갈보다 브라질이 훨씬 친근했다. 또한, 당시 브라질이 조국이라고 생각하는 브라질 태생의 정치가들은 동 페드로가 브라질에 남을 수 있도록 모든 힘을 결집했다.
결국, 그의 선택은 브라질이었다. 동 페드루는 '나는 남겠다'하고 선언하였다.
그 이후 리스본과 리우데자네이루의 마찰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결국, 섭정 황태자는 본국인 포르투갈에서 온 군 병력마저 적으로 간주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리스본의 공문서 하나가 도착을 한다. 그 공문서는 섭정 황태자의 '나는 남겠다' 선언은 무효라고 주장을 하고 브라질에 있는 각료들은 배신자라고 비난하고 그의 귀환을 다시 한번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동 페드루는 황태자비인 레오폴디나, 당신 정치적 수장이었던 주제 보니파시우와 수행원 몇 명이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출발하여 상파울루로 여행 중이었다.
포르투갈에서 긴급히 온 문서를 받은 동 페드로는 자신의 모자에 있는 포르투갈의 상징 깃털을 뽑고 나서 바닥으로 버렸다. 그리고 그의 검을 빼 들어 하늘로 지켜 들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
이 외침으로 그는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렇게 브라질 독립은 동 주앙의 귀환의 날 이후 불과 1년 남짓 사이로 이루어졌다. 이 외침이 브라질 독립의 선언인 '이피랑가의 외침'이다.
그날은 1822년 9월 7일, 상파울루의 한적한 이피랑가 강둑에서 이었다.
만일 그가 다시 지금의 브라질로 와서 상파울루에 가본다면 정말 깜짝 놀랄 것이다. 그가 살던 리우데자네이루는 당시에 수도였기 때문에 그렇다 치더라도 상파울루는 변해도 너무나 크게 변했기 때문이다. 상파울루 그야말로 상전벽해가 된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인구 6000명의 작은 촌락이던 상파울루는 현재 1200만 명의
거대도시가 되었다.
상파울루 브라질뿐만 아니고, 남미 전체에서, 지구의 남반구 전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고 가장 거대한 도시이다. 경제 규모로는 세계의 10위의 도시이다.
브라질 총생산의 10%는 이곳에서 담당하고 있다. 상파울루 사람들은 파울리스타라고 부르는데 브라질에는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의 대명사로 부르기도 한다.
우리의 서울처럼 모든 산업과 모든 경제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많은 외국계 회사들이 있는 국제도시이기도 하다.
이 거대하고 복잡한 남미 제일의 도시, 브라질뿐만 아니라 남미의 경제의 중심지 상파울루는 워낙 유명해서 많은 사람이 브라질의 수도로 알고 있지만, 브라질의 수도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건 마치 뉴욕이 미국의 수도이었던 적은 없지만, 세계의 수도라고 불리는 것처럼, 상파울루 브라질의 수도는 아니지만, 남미의 수도라고 불릴만하다.
우리에게는 남미나 우리나라를 비롯한 제3세계 국가라고 칭하는 나라의 대도시들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소개가 되었다.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는 거대도시의 부정적인 혼란의 느낌만을 강조했다.
사실 우리에게 브라질에 대한 소개는 언제나 범죄, 치안, 부패에 대한 것으로 치중되어있다. 그것이 꼭 왜곡되었다는 말은 아니지만, 한쪽만 소개된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것은 우리가 항상 우러러보는 선진국을 바라보는 것과는 판이하다.
그래서 개발도상국의 거대도시와 선진국의 거대도시들, 굳이 말하자면 뉴욕, 런던, 파리와 같은 도시와는 확실하게 다른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이비라뿌에라 공원이나 파울리스타 대로를 걷다 보면 이런 관념으로 가졌던 상파울루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느낌이 들게 된다.
이 도시는 활기차고 열정적이고 또한 자유롭고 문화적이다. 해변이나 멋진 자연경관은 상대적으로 덜하지만 많은 공원과 박물관, 미술관, 도로, 레스토랑과 바들은 이 도시를 더욱 매력 있게 만든다.
또한, 많은 문화 행사들은 세계적으로 더욱 멋지게 소개해준다. 상파울루 비엔날레, 상파울루 패션위크 같은 문화 이벤트는 이미 세계적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참여한다는 게이 퍼레이드도 상파울루 심장부인 파울리스타 대로에서 펼쳐진다.
상파울루는 주의 이름이자 도시의 이름이다. 상파울루 주의 주도가 상파울루 시이다. 사실 이 메트로폴리탄 상파울루 도시가 어디까지인지 얼마나 큰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이 거대도시 상파울루를 갈 때마다 방향 감각을 읽어버릴 때가 많이 있다. 내가 동쪽에 있는지 서쪽에 있는지 남쪽에 있는지 혹은 북쪽에 있는지 거의 감을 못 잡는다. 그래서 어딘가로 이동을 할 때면 마음 한구석이 미로에 갇힌 눈뜬장님이 벽에 손잡고 걷는 심정 같은 것이었다. (사실 그런 불안감을 이해 못 할 수도 있지만)
지하철은 그나마 낫지만, 버스를 탈 때면 정말 불안과 걱정이 많아진다. 브라질의 버스는 안내방송을 하지 않는다. 버스 안의 노선표도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하냐고? 물어봐야 한다. 다들 그렇게 한다.
주위 사람에게도 물어보고 버스 기사에게 물어보고 버스요금 받는 사람에게도 물어본다. 말이 안 통하면 글로 써서 물어볼 수도 있다.
서울은 한강이라는 분명한 기준점이 있다. 그래서 동쪽 서쪽 남쪽 북쪽이 분명한 위치 점이 있다. 그래서 서울이란 도시는 무언가 질서 정연한 느낌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안내방송이라던가 노선표 등도 잘 보인다.
어쩌면 브라질에 대한 편견, 너무나 다양하고 자유스러워서 혼란스럽고 정연하지 않은 그런 편견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사실이던가.
그럴 때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이 가장 쉬운 법이다. 그리고 차마 자기 탓은 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사실 이 도시에 방향을 항상 모르는 것은 무엇보다 이 도시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외부에서 온 나 같은 촌사람은 파울리스타들의 - 상파울루 사람들은 파울리스타라고 부른다. 완벽한 도시 번역이 필요하다.
명가수 까에따노 벨로주 역시 바이아에서 거대도시 상파울루에 왔을 때 그 익숙하지 않은 어떤 것이 마음 한구석에서 떠올랐고 그래서 그의 명곡 ‘상파, sampa’를 만들었다. -상파는 철자가 거의 samba와 비슷해서 samba에 관한 노래 같지만 사실 그 노래는 상파울루에 관한 노래이다.
오죽하면 그 에게도 이 도시를 확실하게 번역해줄 상파울루 출신의 가수 ‘히타 리’의 도움이 필요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