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복철 Jan 13. 2019

<브라질 팔도유람>  
04.3 상파울루

브라질은 커피, 커피는 블랙

브라질은 커피, 커피는 블랙


홍대 인근 와우산 가는 길에 있는 한 커피 실험실의 대표님과 브라질 커피에 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유명 바리스타이자 브랜딩 전문가인 그가 브라질 커피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항상 브랜딩을 할 때면 브라질 커피는 희한하게 모든 커피와 다 잘 어울려요. 정말로 어떤 것과의 조합이라도 다 가능하다니깐요.”

브라질은 커피마저 다른 것과 섞어도 별문제가 없고 용이하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브라질은 현재까지도 전 세계 커피 생산국의 넘버원의 자리를 계속해서 차지하고 있다. (사실 설탕의 생산 역시 넘버원이다.)


‘브라질은 커피이고 커피는 검다’란 말이 있다.

커피의 대명사는 브라질이고 검은 커피는 검은 노예의 노동력에서 나온다는 의미로 보통 해석이 된다.

브라질은 16세기에 붉은 브라질 나무로 시작되어서 17세기부터 하얀 설탕의 시대로 18세기의 노란 금의 황금광 시대를 거쳐 19세기는 검은 커피의 시대로 넘어왔다.

그리고 이 커피의 시대가 바로 작은 도시였던 상파울루를 세계적인 거대도시로 우뚝 서게 한 것이다. 

19세기에 브라질은 독립하고 근대 사회로 변화를 하는 중심은 커피가 있었다.

브라질의 중심 역시 처음 사탕수수의 기반으로 한 북동부의 바이아에서 남하하여 황금광 시대의 미나스 제라이스와 리우 데 자네이루를 거쳐 검은 커피 시대인 상파울루로 넘어왔다.

리우 데 자네이루와 상파울루의 남서 시대는 현재까지 정치와 경제 브라질의 대동맥이 되었다.


1980년대 한국에는 바나나가 아주 귀한 과일이었다. 당시의 어린이들에게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라면 믿기 어렵겠지만 바나나를 먹고 싶어 했다. 당시 바나나는 아주 달고 희한한 과일이었고 귀한 과일이었다. 당연히 비싼 수입 과일이었다. 바나나를 먹는다는 것은 정말 무언가 있어 보이는 것이었고,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고, 친구들에게 커다란 자랑거리였다. 

지금의 바나나는 너무나 널려있어서 별 매력이 없지만 말이다.

귀한 것, 지금은 먹지만 내일은 먹기 힘든 것은 온 미각과 감각을 총동원해서 먹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내가 부자가 된 것 같은 착각을 들게끔 한다.

과거에 세계에서 후추도 그러했고 설탕도 그러했다. 그리고 커피 역시 귀한 음료였다. 커피가 귀한 것은 유럽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커피 역시 이슬람 세계의 음료이었고, 유럽인들에게는 신비의 음료이었다. 


유럽에서 커피가 유행되기 시작한 것은 커피하우스란 것이 생기면 서부터이다. 이런 커피전문점은 역시 값진 것이라서 상류층의 만남의 장소였다.

유럽인들이 직접 커피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말 네덜란드 식민지 자바섬에서 부터 이다. 우리에게 자바커피로 알려진 바로 그 자바 말이다. 오죽하면 컴퓨터 프로그램 자바 역시 커피 모양의 로고를 쓰고 있다.

네덜란드는 커피를 독점하고 싶어 했다. 이 커다란 이익을 자기만 가지고 싶고 좌지우지하고 싶어 했다. 이윽고 커피는 또 다른 네덜란드 식민지인 수리남에 진출했고 네덜란드는 커피 종자나 씨를 엄격하게 통제했다. 하지만 이러한 통제에도 커피 스파이들은 마치 문익점이 목화씨를 몰래 들여오는 것처럼 커피 종자를 프랑스와 영국으로 퍼트리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윽고 브라질에도 커피가 상륙했다.

이러한 엄격한 통제에도 커피가 들어올 수 있던 것은 바로 사랑의 힘이었다. 

브라질의 해군 장교와 사랑에 빠진 프랑스령 기아나 총독 부인이 프랑스 정부의 몰래 그에게 사랑의 징표로 꽃다발을 선물하였고, 그 속에는 커피 종자도 함께 있었다.

이 브라질 해군 장교와 기아나 총독 부인의 사랑, 혹은 불륜은 커피 씨앗이 되어서 브라질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브라질의 방대한 영토와 노동력은 곧이어서 설탕이 그러한 것처럼 커피의 대중화를 이루어 낸다. 세상, 특히 유럽 대중의 미각들은 브라질에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브라질에서 작물이 재배되면 상류층의 것들이 대중의 것으로 돌아오게 되니깐 말이다. 지금 사람들이 툭하면 메이드 인 차이나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당시에는 브라질산을 이야기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의 바탕은 역시 노동력이었다. 그중에서 고통스럽고 비인간적인 인디오, 흑인의 노예 노동력이었다. 


유럽의 사람들, 특히 영국 사람들의 커피하우스는 대성공이었다.

영국 사람들은 이제 툭하면 커피하우스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수다를 떨었다. 이런 수다는 계속해서 아이디어를 교환했고 이것이 산업혁명의 혁신, 영국의 자본 혁신을 이루어 냈다. 

커피는 검은 노예들이 생산한 검은 커피의 카페인은 유럽의 머리를 각성시켰고 그들은 이런 각성으로 산업혁명과 자본의 혁신이 있었다. 어쩌면 애덤스는 커피의 각성으로 국부론을 쓴 것 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각성은 노동자에게 가장 직접적이었다. 아침에 커피 한 잔의 낭만은 사실은 유럽의 공장, 임금 노동자들이 좀 더 많은 일을, 잠을 덜 자구 많은 일을 하는 것으로 소비가 되었다. 이런 커피의 대중화의 공급처는 브라질 특히 상파울루 커피 농장이었다.

상파울루 커피 농장에서 생산된 커피는 산투스 항을 통해서 전 세계로 수출이 되었다.


한국에서 브라질 원두 중에 가장 일반적이고 유명한 것은 산투스 no 2다. 산투스가 바로 항구 도시 산투스이고 상파울루 커피는 모두 이곳을 통해서 수출되기 때문에 그러하다. no 2는 커피의 등급을 나타낸다. 등급은 no 6에서 no 2까지 있는데 이는 원두 300g당 결점 원두가 작은 것을 의미한다. 즉 no 6은 86개까지이고, no 02는 4개 이하로 붙여지는 등급이다.

이 등급은 no 02가 최고이고 no 1등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산투스 커피는 20세기가 들어서 80% 이상의 커피를 전 세계에 수출하였다.


그리고 상파울루 중심으로 한 브라질 커피의 폭발적인 증가는 미국의 커피 시장도 한몫을 단단히 했다. 미국에서도 아침에 커피 한 잔의 습관이 시작한 것이다. 이 습관은 단번에 그야말로 폭발적인 커피 증가를 이루어 냈고 이런 증가는 계속해서 확대 전개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 역시 언젠가부터 ‘점심 후 아메리카노’가 습관이 되었다. 


브라질은 커피 생산으로 근대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브라질의 커피 생산이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곳은 상파울루가 아니라 원래 리우 데 자네이루였다. 리우 데 자네이루에는 커피가 생산되고 유통하기 위한 여러 제반 시설, 특히 수출입과 커피 원두의 이동 등의 운송 등 인프라가 잘 이루어져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커피 농장은 점점 퍼졌는데 드디어 상파울루에서 꽃을 피웠다. 특히 상파울루 기후와 테하 호사라고 불리는 붉은 토양은 커피와의 찰떡궁합을 과시했다. 


커피의 신장은 새로운 사회 계층과 새로운 노동력을 만들어내었다. 상파울루 중심의 커피 산업은 자본을 축적할 수 있게 했고, 이는 철도, 은행, 상업부문의 투자로 이어졌다. 이러한 확대는 각 도시 간의 네트워크와 생산과 소비들의 경제 다양화를 이루어 냈다. 

또한, 대규모 이민자의 입국은 생산, 소비, 노동력 시장을 촉진했다. 

과거 커피의 생산은 전적으로 아프리카 흑인 노예에 의존했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이 들어 영국과의 협정으로 노예 수입이 금지되자 커피 농장은 대규모 이민자를 노동자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커피 농장은 전통적인 사탕수수의 농장과 비교했을 때 노동의 방식이 조금 다르다. 사탕수수는 경작과 그리고 제당소에서 설탕을 추출하는 과정에 막대하고 고된 노동력이 필요하다. 커피의 노동력은 주로 커피콩의 수확과 연결이 되는데 그것은 선별의 과정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좋은 콩을 선별하는 과정이 필요하는데 그것은 동기가 없는 노예노동으로는 좋은 결과를 이루어 낼 수가 없었다.

또한, 커피콩을 껍질을 제거하는 기계 등의 혁신 기술 역시 노예노동에서 커피를 자유롭게 만들었다.

특히 상파울루 커피 산업은 노예해방 이전에 이미 자본을 축적하고 기술의 발전을 이루어서 별 타격을 없이 대규모의 이민 노동자를 받아들이면서 성장하였다. 

과거 육체노동에만 의존하던 농업이 새로운 기술로 인한 기계의 도입으로 생산량은 혁신적으로 늘어났다.

이런 자본주의적 시스템은 새로운 커피 부르주아를 탄생시켰고 또한 새로운 임금 노동자를 탄생시켰다.


노예해방과 커피 부르주아는 선명하게 과거의 방식으로 큰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그것은 분명한 두 부류의 차이를 보여주었다.

한 부류는 옛날식의 귀족, 대농장주의 방식이었고 다른 한 부류는 커피 부르주아와 기업가 정신의 자본가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커피 산업을 통한 많은 변화와 성장을 기반으로 상파울루는 공업에서도 큰 성장과 발전을 가져왔다.

그리고 전체 브라질과 남미 경제의 이끌게 되었다.


<아메리카노를 커피가 아니라 차라고 비웃던 브라질에서 스타벅스를 만나는 것은 어색하면서 익숙한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브라질 팔도유람>   04.2 상파울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