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더 이상 처음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살면서 이미 많은 일을 겪었고, 웬만한 설렘쯤은 무뎌졌다고 여겼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순간 찾아온 작은 변화들이,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하고 반성하게 했다.
엄마손의 손을 꼭 잡고 학교 운동장에서 반배정을 받고 서있던 나. 검정 바탕에 꽃들이 화려하게 그려진 원피스를 입었던 초등학교 입학식. 생각해 보면 살면서 입었던 옷들 중 가장 화려한 패턴의 원피스였다.
고3 수능시험이 끝나고 했던 인생 첫 알바 전화를 걸어 학습지를 소개하는 일이었다. 물론 단 한 명도 등록시키지 못했다. 사장님 핑계를 대며 우리의 월급을 미루고 미루고 미루며 주지 않았던 실장이라는 여자. 결국은 실장의 거짓말이 들통이 났고 알비비를 받았지만 인생 첫 사기를 당할뻔한 사건이었다.
예뻐서 동네에서 엄청나게 인기 많았던 초등동창. 어느 날 새벽 남자 친구와 싸운 후 무단횡단을 하다 교통사고로 하늘나라로 갔다는 누군가의 첫 부고 소식. 대학교 입학을 앞둔 19살 소녀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부모님을 조르고 졸라 처음으로 키운 강아지 방울이. 방울이를 잃어버리고 정신을 못 차리던 언니들과 나. 두 번째로 키운 강아지마저 하늘로 간 이후 동물에게 정을 주는 것이 두려운 사람이 되어버린 내가 되었다.
낯선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고 서로를 향해 미소 짓던 첫 만남.
마주친 두 눈빛에 부끄럽고 수줍던 찰나 묘한 분위기로 흐르는 공기를 따라 살포시 나의 입술 위에 겹쳐진 또 다른 입술. 심장이 터질듯한 그날 밤.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가서 티브이 속 여주인공처럼 호텔가운을 입고 기념이라도 되는 듯 사진을 찍었던 나.
접시 위에 곱게 올려진, 그토록 먹고 싶었던 집김밥과 맛있는 기름냄새로 코끝을 자극한 김치전.
누군가 날 위해, 나만을 위해 만들어 준 좋아하는 것들로 차려진 저녁상. 소박한 그러나 따뜻한 정성이 담긴 저녁상이 임금님 수라상의 화려함을 이긴 처음이었다. 말없이 무심하게 빈 잔에 맥주를 따라줄 때 컵에는 맥주가 마음엔 사랑이 한가득 쌓였다. 백 번 이상 수없이 먹어봤을 김밥과 김치전 그리고 하이네켄, 익숙한 존재들이 주는 낯선 그리고 설렌 감정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말이 전부라 생각하며 살던 내게 말없이 행동으로 전하는 사랑을 처음으로 진하게 느꼈던 저녁이었다.
지난 금요일 바다를 보러 남해를 가게 되었다. 남해를 갔을 때마다 딱히 좋았다는 생각이 없었던 터라 기대가 없었는데 우연히 간 산책로, 가게 사장님이 직접 잡은 생선을 파는 가게에서 먹은 쫄깃하고 담백한 회, 통창으로 내려다 보이는 바다뷰 카페에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남해가 처음으로 좋아지는 날이었다. 처음이 아니어도 다시 좋아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처음 겪는 일들의 행복감에 휩싸이다 보니 여전히 아직도 많이 남아있을 처음을 기대하게 된다. 처음이 아니라고 해서 덜 좋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인생 처음으로 어떤 처음이 나에게 또 있을까? 기대하게 된다.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당연하게 만큼 주어지는 처음이 있다. 매일 아침이 그렇다. 매일의 밤이 그렇다. 오늘 하루가 인생의 첫날이라고 생각하고 살아본다면 더 많은 행복감을 느끼며 살 수 있지 않을까? 처음이지만 처음이 아닌 것처럼 익숙해서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싶다.
당신은 오늘, 어떤 처음을 만났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