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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을의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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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희 Mar 29. 2018

을의 연애 6

‘갑’은 언제든 ‘을’을 붙잡을 수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환은 술만 마시면 복희에게 폭언을 했다. 처음엔 귀여운 수준이어서 그녀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추임새 같은 가벼운 욕에서 ‘년’자가 붙더니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다. 나중에는 복희에게 손찌검을 했다.


그는 술에 취해 복희에게 욕을 하며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는 자기도 술주정을 할 때가 있으니까. 주사가 심한 사람을 많이 봤으니까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어르고 달래 집까지 데려다 주곤 했다. 아무리 늦은 새벽이라도 걱정이 돼서 항상 바래다 줬다.


나중에는 취할 때마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복희는 싸움으로 번질까봐 조마조마 했다. 그때마다 말렸지만, 이미 취할 대로 취한 그의 귀엔 제대로 들릴 리가 없었다. 나중엔 아무런 이유 없이 복희에게 직접적으로 ‘년’자를 붙여가며 욕을 했다. 참다 참다 화가 난 그녀는 적당히 하라고 화를 내곤 했지만, 고쳐지는 것은 전혀 없었다.


술만 취하면 변하는 그는 어느 날 학원 형들과 함께 술을 마시러 간다고 했다. 복희는 장난 식으로 ‘거기에 여자도 있는 거 아니냐’고 물어봤지만, 주환은 복희에게 의심 좀 그만 하라며 성질을 냈다. 그러한 반응에 복희는 괜한 의심을 했나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이 미안함은 분노에서 허무함으로 바뀌어버렸다.


그는 새벽에 술을 다 마시고는 복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고 싶으니까 나와. 집에 가기 싫어.”


이 한마디에 복희는 피곤한 것도 뒤로 한 채 그를 보러 나갔다. 그는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이미 취해있었다. 아예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없을 만큼. 그래서 그녀는 주환을 집까지 데려다줬다. 집 앞에 도착하니 그는 집에 같이 들어가자고 했다. 거절했지만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 어쩔 수 없이 같이 집으로 들어갔다.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는 침대에 누웠다. 복희는 갑자기 이상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여자랑 같이 있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때 그의 전화벨이 울렸다. 여자였다. ‘안다미.’ 복희는 그 이름을 보자마자 ‘저 여자랑 술을 마셨구나’ 생각했다. 주환은 복희 앞에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야 너 어디야?”

“나 집에 왔지”

“뭐야 왜 그냥 갔어.”


복희에겐 그 여자의 애교스러운 목소리가 역겨웠다. 그녀는 미동도 없이 방 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복희의 눈치가 보였는지 그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 그냥 끊어 좀.”


그렇게 전화는 끊겼다. 그녀는 기다렸다. 주환이 변명할 시간을.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아무런 변명도 설명도 없었다. 결국 이번에도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자 없었다며.”

“응.”

“그런데 그 여자는 뭔데.”

“아 그냥 같이 놀았어. 그리고 그게 여자냐? 내가 쟤한테 관심 있냐? 아무 사이도 아닌데?” “아무 관심 없으면 그 여자가 남자가 되는 거야? 지금 네가 나한테 거짓말 한 게 중요한 거 아니야?”

“아 진짜 미친년. 말 존나 많네. 내가 그 여자랑 손을 잡았냐 섹스를 했냐 나 진짜 떳떳하거든? 복희야 나 너 이럴 때마다 숨 막혀 죽을 것 같아.”

“야. 최주환. 내가 지금 너한테 딴 짓 했냐고 따졌어? 그런 거 다 떠나서 나한테 거짓말 한 게 잘못 됐다는 거잖아. 왜 이렇게 말을 못 알아들어?”

“아 진짜 존나 귀찮다. 그냥 헤어져 미친년아. 난 진짜 너무 떳떳한데 네가 의심해대니까 기분 더럽네. 나 못 믿지? 그냥 헤어져.”

그의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이 나온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 때마다 복희가 잡았다. 울고 불며 매달렸다. 그런데 이번엔 아니었다. ‘헤어지자’는 말이 충격적이지도 슬프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평화로웠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처음으로 그녀는 그 말을 듣고도 이성적이었다.

“그래 그럼. 잘 지내.”


이러한 대답이 최주환에겐 예상 밖일 것이라는 걸 복희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점에 대해 기대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았다. 그만큼 여자 문제는 그녀에겐 치명적이었다. 그녀는 그대로 방에서 나가버렸다. 주환의 반응도 복희에겐 예상 밖이었다. 그는 나가는 복희를 붙잡았다. 신발을 신는 그녀에게 제발 그러지 말라고 빌었다. 그녀는 단호했다.


“놔. 잡지마.”

“제발 왜그래 진짜. 내가 미안해 다 설명할게 일단 다시 방으로 들어가자.”

“놔. 더러워.”

신발을 신은 복희가 나가려고 하자 그는 복희를 강제로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뭐하는 짓이야? 헤어지자며, 알겠다고 헤어져 준다고. 너 그동안 나랑 헤어지고 싶어 했잖아. 내가 붙잡아서 억지로 나 만난 거잖아.”

“그런 적 없어. 화나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 했던 거야. 갑자기 왜이래”

“갑자기? 너한텐 내가 이러는 게 갑자기야? 그럼 난 네가 헤어지자 할 때마다 붙잡고 울 줄 알았어? 야 진짜 너랑 난 아닌 것 같아. 그만하자.”

“복희야 진짜 왜 그래 그게 아니고 형들이랑 노는데 학원 누나들도 같이 놀게 된 거야. 다른 짓 절대 안했어. 믿어줘.”

“다른 짓을 떠나서 거짓말 한 게 화난다니까? 그래놓고선 너 당당하잖아. 그런 태도여도 내가 다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니까 네가 당당하지. 그만하자. 나 원래 의심 많고 집착 많은데 이런 꼴 보고 더 이상은 못 만나. 이번엔 내가 내 눈으로 봤잖아. 나한테 거짓말 하고 다른 여자 만난 거. 이건 못 되돌려 그만하자.”

“복희야 제발 이제부터 네가 의심하고 집착해도 내가 다 믿음주려고 노력할게. 그러지마 헤어지지 말자.”

“너 진짜 못됐다. 내가 매달릴 땐 거들떠도 안보더니 이제 내가 너 떠날 것 같으니까 이제야 믿음을 줄 마음이 생기는 거야? 너도 진짜 대단하다.”


그녀는 그만하자, 최주환은 제발 그러지 말아달라고 붙잡는 대화를 반복했다.

복희는 그가 쩔쩔 매는 모습을 보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건가? 이제 좀 편하게 만날 수 있겠네’라는 생각으로 그녀는 그에게 붙잡혔다. 열흘이 채 지나지도 않아 그녀는 그 생각이 잘못된 판단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복희는 원래 자기 자리였던 ‘을’로, 그는 ‘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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