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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희 Jul 05. 2018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끈질긴 욕구, 즉 야심이 우리를 삼켜버릴 수 있다

이번 주엔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이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어떻게 우리의 삶이 바뀔 수 있는가, 나에게 질문하는 시간, 행복을 위한 새로운 우선순위, 진짜와 가짜 구별하기, 잘되는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할까,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법, 끌리는 사람들의 공통점, 불확실한 세상을 잘 살아가려면, 살기 좋은 사회가 만들어지는 과정, 현재의 우리를 위한 애덤 스미스의 따뜻한 조언이라는 10개의 주제로 나뉘어 있다. 러셀 로버츠가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요약한 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자신의 인생이 긍정적으로 변화했다는 작가의 언급을 보고 많은 기대를 했다. 하지만, 내가 <도덕감정론>을 직접 읽지 않은 채 그 책을 읽은 작가가 쓴 저술이라 그랬던 건지, ‘나도 작가처럼 변화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너무 큰 기대를 해서 그랬던 건지. 나에게 이 책은 그렇게 큰 울림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생각을 한 번 더 돌이켜 볼 수는 있었다. 



p.99 동료가 사소한 일에 짜증낸다면사소한 일에 예민하게 군다고 당황해 할 것이 아니라 이를 거울삼아 나도 사소한 일에 짜증낸 적 없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하고 이상적인 말이지만 평소에 행하기는 힘든 일이다. 다짜고짜 상대가 짜증내는 상황에서 ‘내가 저랬던 적은 없을까’하고 반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특히나 나는 상대방의 감정에 쉽게 동요하는 편이라 상대가 화를 내면 나는 더 불같이 화를 냈다.


하지만 요즘에서야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엄마와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아지면서 엄마와 내가 굉장히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1. 무시하면 그만인 일을 꼭 입 밖으로 꺼낸다. 2. 짜증이 나면 ‘짜증나’라는 말을 계속 한다. 다른 점 또한 있었다. 난 누군가가 화나게 할 때 따지는 편이라면, 엄마는 저 사람은 그릇이 저것 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며 무시하는 편이었다. 여튼, 1번과 2번의 행동을 하는 엄마를 보며 나 자신에 대해 반성 아닌 반성을 하게 됐다. 1번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데 왜 저렇게 하나하나 따질까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2번은 ‘짜증나’라는 말은 좋았던 기분마저 망칠 수 있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잘 알지 못한다. 누군가가 영상을 찍어서 보여주면 내가 이런 행동을 하냐며 놀라기도 한다. 제 3자가 되어 자신의 행동을 볼 수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자신과 비슷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이상하게 찔린다. 누가 ‘너 저 사람이랑 행동이 비슷해’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아예 모르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굳이 자신의 나쁜 행동을 알고 싶지 않아 외면하다가, 마주했을 때는 ‘아. 내가 저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하는 걸지도. 


p.129 우리는 우리 삶을 만족시킬 도구들을 이미 모두 갖고 있다삶의 기본적인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이탈리아 반도를 정복할 필요는 없다그러므로 우리 내면의 인간다움을 유지하고 마음속 비열한 생쥐를 짓눌러야 한다인생은 경주가 아니라 음미하고 즐기는 기나긴 여정이다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끈질긴 욕구즉 야심이 우리를 삼켜버릴 수 있다.


이 부분에서도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책에서는 돈이 많다고 행복한 건 아니라고 말한다. 예전 같으면 아니라고, 돈은 행복도 살 수 있다는 소리를 했을 것이다, ‘내 계좌로 하루에 오백 만원 씩 누가 줬으면 좋겠다. 돈이 엄청나게 많아서 계속 써도 부족하지 않았으면 좋겠어.’는 내가 자주 하는 말이다. 아니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면 자주 ‘했던’ 말이다. 이런 말을 할 때면 우리 엄마는 ‘복희, 너는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해? 돈이 전부가 아니야. 돈이 그렇게 많으면 행복할 것 같지? 그렇지도 않아.’라는 대답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엄마, 행복은 돈으로도 살 수 있어.’라는 말로 맞받아치곤 했다. 분명 상상일 뿐이었는데 내가 원했던 ‘오백만 원’은 ‘팔백만 원’이 됐고 어느새 ‘일억 원’이 되어버렸다. 실제로 하루에 오백만 원을 받아본 적도 벌어본 적도 없었으면서 상상에서의 돈은 점점 커져만 갔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스미스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나의 상상 속에서의 ‘오백만 원’이 어느새 ‘일억’이 되어버린 것처럼.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내가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나는 비슷한 돈을 벌고 쓰고 있다. 하지만 돈에 대한 집착이 사라진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돈에 집착을 하던 그때는 가끔씩 부모님이 주시는 백만 원이 넘는 용돈도 우습게 보였다. 감사하긴 했지만 더 받고 싶다는 욕망이 강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가끔 받는 오만 원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따라서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끈질긴 욕구, 즉 야심이 우리를 삼켜버릴 수 있다.’라는 말은 사람들이 꼭 깨달아야 하는 것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에서 스미스는 ‘인간의 삶이 비참하고 혼란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소유물이 곧 나 자신이라 착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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