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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항상 온다는 사실

by 사십대 소녀

왜 인간에게 삶이 주어진 것일까?

우리는 왜 태어난것까?


이것이 심오하고 어려운 질문이며 동시에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대답할 필요조차 없는 질문이라면,

그렇다면 어쨌든 태어난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죽을 때 후회 없을까?



아마, 이런 물음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나 역시, 사회생활 하기 전까지, 학생의 신분이였던 20대 초반까지는, 그저 내게 주어진 학생의 역할을 하며, 부모와 학교가 하라는 것들을 하며 내 앞에 형성된 길을 별 의심없이 걸으며 별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20대 중반부터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직업에 대한 고민을 참 많이도 했던 것 같다.

직업은 내가 어떻게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동시에 사회적으로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지표이잖아.

당시 나는, 나의 대학 전공과 쭉 연결되어 이어진 직업의 Contents, 즉, 매일마다 해야 했던 그 직업의 업무와 본질에 충만감을 느끼지 못해 참으로 오랜 시간 힘겨워 했었다.

지겹게 이어진 성실함이 빛을 발휘, 경력 6년 정도가 지나며 서서히 적응, 10년이 지나, 회사란 장소가 어느 정도 익숙하고 편안해질 무렵, 나는 결혼 8년차에 아이를 낳았고, 회사 다니랴, 아이들 양육하랴, 참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쌍둥이 우리 남아들 12개월차까지 육아휴직을 하고, 부모님 도움 받으며 다시 회사로 복귀, 다시 일을 하면서, 육아에서 벗어난 해방감도 맛보기 했지만, 그와 함께 '시간의 가치'에 대해, '나의 가치'에 대해, 즉,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라는 생각을 가장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처음으로, 무엇을 해야 한다는, 무엇을 하고 싶다 그런 '직업'적인 것에서 벗어나, 나는 어떤 인간으로 살고 싶은가. 그런 물음들.

아이들을 행복하게 키우고 싶고, 멋진 엄마가 되고 싶은데, 멋진 엄마는 어떤 엄마일까?




음...잘은 모르겠다만, 우선 현실이 불행하면 안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삶의 1차적인 목표를 향해 뛰는 사람이되어야 하지 않을까? 가령, 돈을 위해 일하면서, 아이에게는 행복한 삶을 살라고 가르칠 수 있을까?

나는 나의 언행이 일치된 삶을 살며, 그 충만함 안에서 아이들을 양육하고 싶었고, 또 다시는 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 아이의 성장 과정을 다른 사람 손에 맡겨주고, 과연 회사에서 열심히 돈을 버는 행위가 내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지 나름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 같다.


그 진지한 고민 덕, 들어가기 보다 나오기가 더 어렵다는 퇴사를, 그래도 나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회사 다니는 내내 그만두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것을 그 시기에, 나름 어렵지 않게 결단 내릴 수 있었던 걸 보면, 아마 인생에는 정말 때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어찌어찌 난 회사를 그만두었고,

이렇게 난 오늘 아침 버스를 타고 학교로 향한다.


올해, 아이들은 8살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고, 나는 그들의 서툰 학부모이자, 대학원 1학년생이 되었다. 해야만 했던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닌, 하고싶은 공부를 하고자 용기 내어 선택했으며, 학교 시작한지 1달이 지난 4월, 아직은 버텨야 하는 힘겨운 시간 안에 놓여 있다.


봄이 오는 시기라, 여기저기 꽃도 피고, 하늘도 맑고! 화창한 주말 같을 때는 아이들과 신나게 놀아야 하는데,

마음 한구석 공부를 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나를 괴롭히기도 하지만, 그래도 힘듦 아래 기대감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창 밖을 바라보는데!


문득, 정말 문득,

내 삶이 흘러 이렇게 지금까지 온 모든 과정이 강물처럼 자연스레 흘러흘러 자기 자리를 찾아 드디어 내게 선물같이 오기 위한 과정이였을까.

지금까지의 내 인생 모든 과정이 바로 내게 이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한 단계들이 였을까..

그러면서 머리를 스치는 단어, 바로


‘사랑’


삶을 사는 목적,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의 답.

이것이 바로 삶의 열쇠인걸까.

불연듯이 스쳤다.



이십대까지는 별 생각 없이 살라는 대로 살다가,

삼십대 초중반 까지는 직업, 사회적 위치, 역할에 집착하다가,

삼십대 중후반부터는 나의 정신적 성장, 나와 세상에 대한 이해, 이것들이 내 삶의 목적 아닐까 라는 생각을 줄곧 했었는데,

아무리 가져도 충족할 수 없는 것들 위에 독보적으로 서있는 우리 아이들의 얼굴.


삶 속에서 우리 모두가 고군분투 하는 이유가 결국은 '사랑' 을 찾기 위한 것이고

수없이 반복되는 희노애락, 기쁨과 화남과 슬픔과 즐거움 아래 또 수업이 돌고도는 우리의 삶 안에서, 우리가 죽을 때까지 그토록 찾아헤매는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정답이 바로 사랑 아닐까 하는 확신이

가슴속에 훅 들어왔다.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며, 그 안에서 아이가 주는 무한한 사랑을 받고 느끼며, 그것이 나고 모르게 나를 채워준 느낌이다.

만약 이 사랑이 없었다면, 혹은 이 사랑이 한순간 사라져 버린다면, 내가 지금처럼 행복하고 평온하게 삶을 이어나갈 수 있었을까.


아이를 낳고 처음엔 그것의 책임감으로 열심히 아이를 양육했다만

그 양육의 과정아래 서로 주고 받는 사랑의 힘이

나를 충만하게 변화시켰고

지금까지 내 삶의 여정이 이것이 깨닫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은 아니였을까



학교 가는 길.

이렇게 사랑을 경험하며, 사랑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에 참 감사한 마음이 든다.


겉으로 보이는 삶은 그저 겉 껍데기 뿐인 것 같다.


과정안에서의 힘듦과 짜증과 불안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지, 그것이 지금 이순간에는 보이지 않아 너무 답답하지만, 무엇이든 시간이 지나면 그 의미가 서서히 드러나는 것 같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이끌어 주는 무엇. 단지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


그러니, 조급할 필요도

아침 6시에 깨워주겠다고 장담하던 인물이 미동도 없이 쿨쿨 잠 자고 있는 얄미운 남편에게 뺵뺵 소리칠 필요도 없이

나는 그저 내 안에서 감사하며, 그렇게 오늘도 성실히 하루하루 살아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는 오늘의 생각.

봄은 항상 일정 시간을 기다려야 오는 것 처럼.


2023년 4월 12일 버스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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