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가 중요한 이유는,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어 그것이 말이 되는 순간, 그것은 동시에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어떤 확신의 씨앗을 주게 되는 것. 즉, 그것이 좋은 생각이었건, 나쁜 생각이었건, 의심이었건, 불안이었건, ‘생각’이 입 밖으로 나와 공기 중에 떠돌다가 본인의 귀에 다시 울려 퍼져 전달될 때, 그것이 마치 거미줄이 되어 나의 뇌를 점령하는 듯, 나는 거미줄에 갇혀 그 생각에 매몰되고 만다. 처음 생각은 그저 단순한 의심 였는데, 그 의심이 확신이 되어 나를 옥죄게 되는 것. 이도 저도 못하게 나의 발목을 붙잡는 거짓된 최면. 누구도 아닌 나의 입을 통해 나간 말이 그렇게 나의 사고를 제한 시킨다.
무엇인가를 하고자 할 때, 여러가지 현실적인 상황과 본인의 능력을 가름해보는 것은 필수적으로 중하지만, 그리고 과정 아래 발생되는 여러 예상치 못한 변수를 고려하여 조정함도 불가피하지만, 어쨌건 본인의 인생에서 변화 혹은 진전을 위해 어떤 결정을 했다면, 결정을 결과로서 이루기 위한 긍정적 사고와 필요한 행동을 해야 한다. 반복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도 과정 아래 맞닥뜨리게 되는 자연스런 전개지만,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이런 불안과 의심의 생각을, 은연 중 친구들과의 대화 중 입밖으로 내뱉게 될 때, 그 말은, 내 결정의 진행을 저지하게 만드는 상황을 초래 하게 된다. 즉, 긍정적이기 보단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게, 힘들겠네” 이런 류의 말들은 위로가 될 수는 있겠다만, 현재의 상황 아래 나의 처신에 대한 묘한 합리성을 부여해주어, 어려운 상황 모면하고 싶은 욕구를 자극하기도 하고, ‘넌 잘 할 수 있을꺼야” 란 긍정적인 류의 답변은 단기적으론 힘을 북돋아주는 동기가 될 수는 있겠다만, 자신의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내 자신” 이라는 사실을 은연중 거부한 셈이 되는 것이고, 그러므로 이것이 반복될 경우, 힘들 때마다 타인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경향이 생겨 궁국적으로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힘듦의 원인, 상황의 원인, 생각의 원인은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수많은 요인들로부터 야기되는데, 말을 하는 순간, 내가 말한, 그리고 상대방이 이해한 한계내에서 모든 원인과 결과들이 제한되어 고정된다. 그러므로, 폭 넓은 사고를 하지 못하게 되고, 틀 안에 갇히게 된다.
“다시 취업을 해야 할까?” 그런 고민이 빈번하게 들었던 2024년 지난 몇 달 동안, 난 친구들을 만나기만 하면 묻고 또 묻곤 했었다.
“니 생각은 어때? 나 어떻게 해야 하니?” 그러면 그들은 각기 다른 자신의 상황내에서 이해 한 바에 따라 나에게 각기 다른 대답을 건네 주었는데, ‘다시 취업 해라’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래 맞아. 올해 지나면 취업은 정말 불가능해질 텐데, 내가 세상물정 모르는 걸까. 링크드인을 들락날락 업계 회사 웹페이지를 들락날락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쩔쩔맨다. 그러다가 '그냥 니가 하고자 하는 걸 해’ 라는 친구의 말을 들을 땐 그냥 고맙다는 생각과 함께 참 민망한 마음이 들었었다. 이걸 내가 왜 얘한데 묻고 있나. 현타가 온다.
아무리 절친한 사이더라도, 나의 결정은, 나의 가치관과 생각과 니즈와 마음의 충만감과 그 모든 것은, 오직 나만이 정확히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에게 그들의 생각을 묻는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 듣고 싶은 의견을 들으면 오케이, 그렇지 않은 의견을 들으면 싱숭생숭. 답변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면서도 왜 다른 사람들의 확신을 구걸하고자 하는 걸까. 힘겨움의 표현, 토로 일 수도 있겠다만, 그로부터 위안을 얻고 싶은 심리는 이해한다만, 그것의 가치가 무엇인가.
나이가 들수록,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는 즐거운 이야기만 한다. 어렸을 때는 힘든 얘기 참 많이 했었는데, 나이 들수록 그저 단순하고 하하 호호 웃을 수 있는 이야기만 하는 이유는, 나의 고민과 힘듦의 본질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음에, 그리고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이야기는 와전 될 수 밖에 없다. 서로의 이야기는 100% 정확하게 전달 될 수 없으며 이야기 한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이왕 친구들을 만났으면 하하 호호 웃으면서 즐거운 이야기로 스트레스 푸는 것이 항상 좋더라.
그럼에도, 너무 답답한 나머지 뭔가 말을 하고 싶을 경우, 자신의 이중성을 이용하는 것. 나 자신을 관찰하고 나 자신과 대화하는 것. 아래는 미국의 철학자이자 시인이자 수필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 (1817~1862)의 고독이란 글에서 발취한 것인데, 이는 소로 외에도 수 많은 명상가들이 유사하게 언급하는 내용이다.
“ 나는 나 자신을 인간이라는 실체, 다시 말하면 여러가지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는 무대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 자신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어떤 이중성을 의식하고 있다…
나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나의 일부가 아닌 존재가 그저 관객으로서 연극을 주목한다. 관객에 관한 한 연극은 일종의 허구이자 상상의 작품일 뿐인 것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우리를 아주 쉽게 시시한 이웃이자 친구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작은 불씨 하나가 초가삼간을 다 태우는 것 처럼, ‘나는 할 수 없어’. 혹은,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이런 의심의 생각이 나를 지배하게 두지 말자. 의심과 불안이 가속도를 밟지 못하도록 나 자신을 믿고, 믿음의 말로 나를 지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