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휴직을 시작하며 새벽 5시 이전에 일어나려 노력을 했다. 미라클 모닝이니 뭐니 그게 뭔지 뭐가 좋은지도 모른 채, 단지 하루를 알차게 보내고 싶어서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집에서의 시간은 회사에서의 시간보다 훨씬 더 빠르게 흐르고, 정말 눈 깜짝할 사이 아이들 하원 시간이 다가오고 밤이 된다. 뭔가 추가로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은 새벽시간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매일 새벽 4시 기상을 하진 않는다. 수없이 일어나다 못하기를 반복한다. 술을 좀 마셨다 치면 일주일은 기본으로 실패한다. 새벽기상이 이제는 뭔가 내가 지켜야할 규율처럼 나를 압박한다. 이것도 스트레스인데, 뭔가 역효과를 주는 것 같아, 그냥 아 내가 피곤하구나 받아들이려 한다. 아쉬워서 그런다. 새벽기상의 매력에 다시 퐁당 빠지고 싶다.
새벽 기상을 시작하면서 명상을 시작했다. 그 무렵 한창 유명한 자기개발서를 많이 읽었었는데, 세계적으로 성공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명상을 한다 길래 그냥 밑져야 본전 생각으로 시작했다. 명상이 뭔지도 잘 모른 채, 성공한 사람들을 따라 나도 그냥 어렴풋한 ‘성공’ 이 하고 싶어서 시작했다.
동네에 보면 몇몇 명상센터가 있긴 한데, 명상을 뭘 학원까지 다니나, 이런 생각에 미국에서 가장후기 좋고, 많은 사람들이 애용한다는 유명한 명상 앱을 깔았다. 항상 처음엔 의욕적이다. 앞으로 1년동안은 핑계없이 꾸준히 무조건 해야지, 1년 구독료 10만원 정도를 지불했다.
그런데 금세 포기했다. 핑계를 대자면, 백그라운드 뮤직이 조금 우울했고, 선생님의 목소리는 나근나근 침착하고 듣기 좋았지만, 행복과 긍정을 유도하며 던지는 메시지가 뭔가 내 생각의 패턴을 인위적으로 끌고 가는 느낌이 드는 게 싫었다. 안 듣기 시작했다. 몇 개월이 지나, 또 다른 명상 앱을 찾아 결재했다. 이번에는 백그라운드 뮤직이 없는 걸 선택했다. 근데 영어라 그런가 아님 선생님의 목소리가 문제인가. 집중하려 노력해도 선생님의 말이 그냥 물처럼 흘러간다.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쫓아가는 느낌이다. 차라리 조용했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했다.
책에서 보면 생각을 없애고 호흡에 집중하라 하기도 하고, 몸의 감각을 느껴보라 하기도 하고.
사람마다 저마다의 명상 방식이 있는 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난 혼자 고요히 아무런 도움없이, 눈을 감고 한다. 이 방식이 나에게는 제일 적합한 것 같다. 깜깜하고 조용한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면 수많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본인들의 존재를 과시한다. 난 이런 생각들을 관찰한다. 순간 번뜩이는 아이디어나 나만의 깨달음, 글 쓸 소재거리 등이 오기도 하는데, 아쉽게 까먹을까 봐 후딱 눈을 뜨고 노트에 흘겨 적고 다시 눈을 감는다. 근데 나중에 보면 잘 모르겠다.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하는데 자꾸 생각을 덧붙이려 한다. 소리에 집중하기도 하고, 그 소리 속 내 존재의 살아있음을 느끼기도 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하려 하는데 쉽지 않다.
존 카밧진의 “처음 만나는 마음 챙김 명상’에서 명상의 핵심은 자각 속에 머무는 것이라고 한다. 생각은 우리가 스스로 지어낸 이야기들로 현실이 아니라고 한다. 내가 생각하는 나 역시 내가 멋대로 지어낸 이야기로 완벽한 진실이 아니기에 섣불리 평가와 판단을 내리지 말고 현재 순간을 온전히 경험하는 연습을 하라고 한다. 인내와 꾸준함이 필요하다.
종교, 믿음과 무관한, 이런 자기개발 측면의 단순한 마음수행이라고 생각하고 명상을 시작했는데, 진지하게 하려 마음먹고 보니, 뭔가 종교와 상충되는 면이 있지 않나 조심스럽기도 하다.
천주교 신자로서, 나만의 방식으로 묵상과 기도와 함께 명상을 하기로 한다.
..
어렴풋한 성공을 그리며 명상을 시작했지만, 그 성공은 행복을 의미한다.
난 세상에서 누구도 나의 행복과 충만함을 대신 채워줄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예외가 다가왔다.
아이들.
사랑.
아이들을 바라보며, 내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한정적임을, 세상 속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으며, 난 우주가 아닌, 세상이 아닌, 하늘이 아닌, 내가 아닌 하느님께 감사와 요청의 기도를 드린다.
이것이 내가 가진 종교이고, 명상을 통해, 나의 종교를 더 잘 이해하고, 감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렇게 명상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