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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정답이 아닌데 왜?

by 사십대 소녀


오늘 아침에 읽은 구절


믿는 대로 될 것이다.

의심을 품지 않은 이는 행복하다.


세상은 신비로 가득하고, 과학은 세상의 티끌만큼만 증명해 보였을 뿐,

인간의 능력으로 파헤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몇 백년 전까지만 해도, 종교와 과학은 하나로 통합되어 있어, '철학' 이란 이름으로 불렸었는데, 시간이 흐르며 차차 종교와 과학, 철학은 그 이름대로 분류되었고, 마치 어떤 합의에 의한 것처럼 서로를 터치하지 않게 되었는데, 이는 그 분야의 권위있는 자들끼리의 모의, 작당 같은 걸로 이뤄진게 아닐까?


이해할 수 없는, 도저히 파헤칠 수 없는 세상의 신비, 자연의 신비도 가득하지만,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속도 똑같다.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규칙과 룰, 마치 정답인 양 따라가는 삶의 방식과 방향성 등 역시 왜? 라는 질문을 던졌을때 명확하게 대답할 수 없다. 왜 태어날 때부터 이런 저런 교육을 받고, 이미 만들어진 사회 시스템 속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길을 따르는 것이 왜 당연해진걸까. 왜?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태어날때부터 정해져 있는 거니깐? 크게 생각없이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는데, 그런데 이 또한 마치 사회의 특정 일부 지위 층 사람들만을 위해 만든 거대한 시스템 같은 생각이 든다. 우리는 회사의 노예라고만 생각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삶 전체가 노예같기도 하다. 은근한 속임수 속, 속고 속이며, 본인만 노예인걸 모른 채 살아가는.



그럼에도.

실질적으로 노예이든 어쨌든,

난 현재로서는 모든 것이 괜찮다. 좋다.

큰 틀에서 보면 부족함이 없다.


회사라는 틀에서 벗어나 시간 유연하게 살 수 있게 된 것도 감사하고,

책도 읽고, 사유도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짐에 감사하고,

분주하고 정신 없는 육아 세계 속에서도

사랑의 충만감을 느끼며 삶을 배울 수 있어 정말 감사하다.


실리 만을 쫒는 현대 사회,

단번에 성취할 수 없는 것은 쉽게 포기하는 조급증의 세계,

돈과 권력이 마치 모든 것의 위에 있는 양 군림하는 사회 속에서

그게 마치 정답인 양 길을 쫓다가, 생각해 보면, 잘못된 선택 이라고 판단했던 과거 속에서도 왜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포기하지 않았음에,

그나마 이제서야 나의 길을 온전히 찾아갈 수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사회가 정답이 아님을 인지하며,

나는 왜 살아가는가?

어떤 삶을 추구하는지 내면과 대화하면서

나만의 답을 찾으려는 굳은 심지를 잃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변화.

우울감과 내면의 텅빈 허무감에 휩싸여 살던 내가 충만감과 믿음 속 단단해 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정말 '사랑' 인 것 같다.

사랑을 느끼고

사랑이 생기고 부터

삶에 충만함이 다가온 듯 하다.

새로운 시각으로 삶을 바라본다.


그럼에도

간사하고 가벼운 인간인지라,

쉽사리 이 마음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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