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새로 산 거예요. 거짓말 아니에요.

옷과 나_02

by 박기복

프리미엄 구독자로서 매달 내는 요금이 아깝지 않게, 하루에도 몇 번씩 유튜브 앱을 연다. 흥미롭다 싶으면 쉽게 구독했다가 손이나 마음이 가지 않는 채널은 수시로 정리한다. 구독만큼이나 손쉽게 이루어지는 구독 취소 속에서도 안정적으로 나의 총애를 받고 있는 장르가 패션 채널이다.


구독자 50만 이상을 보유한 대형 패션 채널 두 개를 구독 중인데 둘 다 참 재미있다. 부지런하고 싹싹한 동생들이 정말 열심히 사는구나 흐뭇할 만큼 수시로 새 영상이 올라오니 자연스럽게 자주 드나들 수밖에. 영상은 10개 중 7,8의 비율로 유료광고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말하자면 시간을 내서 정보를 가장한 광고를 보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을 알 수 있고, 몰랐던 괜찮은 브랜드를 발견할 수도 있으며, 스타일링 팁을 얻을 수 있다는 확고한 장점을 포기하지 못하겠다. 하여 잦은 비율로 영상에 걸린 링크를 눌러 광고주를 만족시키는 소비자가 된다.


얼마 전 새롭게 소개된 브랜드의 룩북 영상을 보다가 첫눈에 저거다 싶은 카디건을 발견했다.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에서 김고은이 입고 나왔던 옷이기도 한데 이렇게 만나다니. 반가움을 참지 못하고 그만 링크를 눌러 요리조리 살펴보(는 척하)다가 냉큼 구입을 했다. 며칠을 기다려 옷을 받아 입었을 때 실은 당연한데 나 혼자만 궁금한 질문을 뱉을 수밖에 없었으니. "어? 김고은이 입은 거랑 많이 다르네?" 난감해하는 나를 향해 남편은 그걸 왜 모르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게다가 카디건 치고는 결코 적지 않은 가격인데, 유튜버가 추켜세울 만큼 고급 재질이 아니라는 점이 갸우뚱했다. 가성비를 두고 고민한 끝에 반품 신청을 했다. 옷값 안에 마케팅 비용이 꽤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며 당분간 광고주를 실망시키기로 결심했다.


새 옷을 향한 마음은 어쩔 수 없는 진심이기에, '반품'이라고 크게 적은 상자를 문 앞에 내어놓으며 '그래, 옷은 직접 만져보고 사야지.' 결연한 다짐을 하고는 신속하게 오프라인 쇼핑을 위해 동대문으로 향했다. 바로 오늘 일이다.


목적지는 제일평화시장. 십 년쯤 전부터 다니기 시작한 그곳에는 갈 때마다 마음에 드는 옷이 있었건만,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를 누볐음에도 오늘따라 눈에 들어오는 옷이 없었다. 옷에 대한 나의 마음이 헛된 결핍감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옷과 나_01이라는 글을 쓴 것이 계기였다.) 확실히 옷을 향한 욕구가 줄긴 했지만 이렇게 사고 싶은 게 없을 줄이야. 막히는 퇴근길을 뚫고, 심지어 저녁 영업이 시작되는 8시까지 기다렸다가 방문한 곳인데 빈손으로 돌아올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마음에 들지도 않는 옷을 살 수도 없었다.


결국 제평을 뒤로하고 주차를 해둔 쇼핑몰 일층을 돌다가 겨우 마음과 눈길을 끄는 옷을 발견했다. 니트 조끼였다. 아, 평생 얼마나 많은 니트 조끼가 나를 거쳐갈까 싶을 만큼 익숙한 아이템인데도 나는 기어이 사고야 말았다. 그러면서 여전히 나는 나일수밖에 없구나 생각했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지난 주말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라는 영화를 보았다. 친구의 격한 추천으로 망설임 없이 찾아가 기대를 품고 보았음에도 기대를 능가하는 재미가, 예상치 못한 흔듦이 있었다. 이야기의 중심축은 멀티버스(다중우주론)이다. 수많은 다른 우주에 살고 있는 나, 나와 다른 나를 상상하는 일이 왜 내게는 언제나 위로가 될까. 변화와 성장을 운운하며 늘 나로부터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영화의 설정상 주인공은 자주 위기에 처하고 그때마다 다른 우주에 사는 또 다른 자신을 소환할 필요가 생긴다. 다른 우주의 내가 가진 위대한 능력을 차용하기 위한 조건은 '웬만해서는 절대 하지 않을 만한 엉뚱한 짓'을 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 기상천외한 B급 유머가 난무하는 포인트이기도 하다. 챕스틱을 씹어먹거나, 손가락 사이를 종이로 세 번 베이거나. 그 옛날의 주성치가 생각나는 유머에 취해 한참 웃다 나왔는데 생각해보니 엄청난 은유 같기도 하다. 대단한 통찰이 아닌가. 살던 대로 살아서는 변화할 수 없으니까. 안 하던 짓을 하고, 안 가던 곳을 가고, 안 입어본 옷이라도 입어줘야 '새로운 나'를 만날 틈이 열리지 않을까. 짐짓 더 과감하게 살아보라는 응원처럼도 들렸다.(영화에 관해 언급한 내용은 빙산의 일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옷장으로 쇼핑을 간 사람처럼 늘 비슷비슷한 옷을 사서 돌아온다. 새 옷을 입고 "이 옷 어때?"라고 물으면 남편은 그거 있는 옷 아니냐고 되묻는다. 나는 변명처럼 새 옷이 남편의 머릿속에 떠올랐을 그 옷과 어떻게 다른지 구구절절 설명한다. 이게 물론 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어제는 종종 제평 나들이를 함께 하는 친구가 아쉽게 혼자 다녀왔다며 전하는 쇼핑 후기를 들었다. 이야기를 압축하면, "괜히 샀어" 또는 "왜 샀지?"처럼 들리긴 했어도 다독여줬는데 통화를 마치고 보내온 사진을 보고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새 옷에서 엄청난 기시감이 뿜어져 나왔다. 본인 옷장에서 꺼낸 것 같다고, 자칫 새 옷 안 사놓고 샀다고 거짓말하는 걸로 오해받을 수도 있겠다고 농을 던지며 함께 웃었다. 그리고 오늘 밤, 쇼핑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는, 새로 산 니트 조끼를 찍어서 사진을 친구에게 보내면서 잊지 않고 덧붙였다. "진짜 새로 산거예요. 거짓말 아니에요." (2022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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