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내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답했다. 난 재벌.
홍제천을 따라 운동삼아 걷는 중이었다. 쓸데없는 고민을 뭐하러 하냐며 핀잔을 줄거라 생각했는데 '선택할 수 있다면 다음 생에 어떤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냐'는 나의 질문에 대한 남편의 답은 즉각적이고도 단호했다.
엄청 외모가 엉망이야. 머리도 나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을 만한 조건을 갖다 붙여도 남편은 마치 이미 재벌이라도 된 듯 여유 있게 웃으며 답했다.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어. 재벌인데." 밋밋하기도 하고 물질만능주의스러운 답변에 살짝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뭐 어차피 하나마나한 질문이고 답변이니까. 이쯤에서 멈추려던 순간 문득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스쳤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음 생에 재벌로 태어났어. 그럼 나 또 만날 거야?"
0.5초? 정도의 정적이 있고 나서 남편은 웃긴데 난감한듯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실룩였다. 언뜻 일순간 행복해 보이기도 했던 건 나의 오해일까.
"내가 재벌이면... 우리가... 만날 수... 있나?"
물 흐르는 소리가 고요한 산책로에서 나는 세차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남편의 유머에 웃었고 그러고 보니 정말 맞는 말이라 더 웃었다. 내가 지금의 나로 태어난다면, 아니 내게 선택권이 주어진다 해도 나는 큰 부자로 태어나는 일에는 관심이 없으니 아마도 우리는 옷깃도 스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재치를 칭찬하며 웃겨줘서 고맙다고 정답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어제의 일이다.
친구들과 한참 대화를 나누던 중 질문을 받았다.
죽은 후 옥황상제 앞으로 갔다. "착하고 성실하게 살았으니 선택권을 주겠다. 다음 생에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니? 단, 사람으로는 태어날 수 없다. 그래도 움직이는 생명체 중에서 골라보거라."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메뚜기였다. 사실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 이 피곤한 삶이라는 것을 굳이 반복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고르라면 나무 정도라고 답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식물은 안된다고 해서 잠시 얼룩말이나 사슴을 떠올렸다가 맹수에게 쫓길 생각에 벌써 피곤함이 몰려왔다. 식물 말고 차선은 곤충이었다. 나는 가볍고 싶었다.
질문은 이어졌다. "안타깝지만 네가 고른 메뚜기는 이미 신청자가 많아서 안되니 다른 것을 골라보거라."
무당벌레. 나의 두 번째 답이었다. 선택의 이유는 비슷했다. 가볍고도 사소한 존재라서였다. 내가 너무 애쓰며 살고 있기는 한가 보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진짜 진짜 미안한데 (아무리 옥황상제라도 이거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그것도 이미 신청자가 많다. 다른 것을 골라보거라."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나비였다. 무당벌레는 좀 심했지? 그래 기왕이면 다홍치마. 나비는 아름답기까지 하지. 나비로 하자.
이 심리테스트는 특별한 해석이 필요 없이 나의 상태를 반영해 주었다.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지금 무엇이 문제인지. 나는 새털처럼 가벼운 존재가 되고 싶은 거다. 자유롭고 싶은 거다. 내게 주어진 기대(남이 하는 기대뿐 아니라 스스로 하는 기대까지 포함된)가 너무 버겁고 자의식도 과해서 어서 힘을 빼야 하는데, 답을 알지만 실천이 어렵다. 특히 두 번째 고른 것이 현재 내가 생각하는 나라고 했다.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어젯밤 출장으로 지방에 내려간 남편과 통화를 하면서 나는 같은 질문을 했다. 마침 영상통화라서 표정도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었는데, 새삼 놀라웠다. 내가 대단한 사람과 살고 있었구나.
남편은 첫 질문에 고래라고 답했다. 살아본 적 없는 바닷속 세상이 궁금해서 그렇단다. 두 번째 응답은 알바트로스. 순간 알바트로스가 뭐였지? 머리가 멍했다. 비행이 가능한 조류 중 가장 큰 종류라는 건 나중에 검색을 통해서 알았다. 바닷속이 안된다면 하늘을 날면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싶단다. 세 번째 답도 범상치 않았다. 백상아리. 평소 '동물의 왕국' 좀 보시더니 아주 선택이 남다르다. 최대 몸길이가 6.5m 되는 큰 물고기로 상어 가운데 아주 난폭한 종이라고 한다.
우리 남편 아주 큰 존재가 되고 싶었구나. 스마트폰 화면 속 꿈꾸는 소년 같은 표정의 그를 보면서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저번처럼 밋밋한 답이 아닌 것도 좋았지만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를 품고 산다는 게 안심이 되었다.
아주 작은 존재가 되고 싶은 여자와 웅장해지고 싶은 남자가 한 집에 살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아끼지만 다음 생에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생은 우리의 마지막 만남. 마음을 다해 잘해줘야겠다. (20230228)